컬렉터의 또 다른 말은 어쩌면 외골수가 아닐까? 이들 부부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프랑스의 장-필리프 프랑수아즈 빌라랑. 이들 부부는 지난 40년간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아트 계열의 동시대 예술품을 수집해온, 외골수들이다. 소장 작가들의 이름만 나열해도 그들의 컬렉션이 얼마나 특별한지 짐작할 수 있다. 개념미술과 미니멀 아트를 대표하는 솔 르윗, 도널드 저드, 댄 플래빈, 프레드 샌드백, 칼 안드레, 요셉 코수스, 리처드 세라, 펠리스 바리니, 닐 토로니 등 1960년대 작품부터 최근의 작품까지 망라되어 있다.

물론 처음부터 방대한 컬렉션을 계획한 건 아니다.

때는 1975년. 당시 부부의 나이 34, 35세였다. 그들은 우연히 딸 친구의 집에 초대되었고, 갤러리를 운영하던 딸 친구 부모의 소개로 인상주의 화풍의 구상적인 회화 작품을 접하게 됐다. 이후 그들은 몇 달 치 월급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인상주의 계열의 풍경화를 첫 소장품으로 구입했고, 자연스럽게 초기 컬렉션은 구상적인 페인팅 작품이 주를 이뤘다. 이후 마티스의 색면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탈리아 화가 알베르토 마넬리의 페인팅을 구입하면서 그들의 컬렉션 방향은 구상에서 기하학적 형태의 추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부는 마넬리의 작품을 구입했을 당시, 이 작품을 들이기 위해 집 전체의 가구 배치와 기존 작품의 배치를 모두 바꿀 정도로 지대한 열정을 보였다. 이후 부부는 더욱 진지하게 컬렉션을 발전시켜갔다. 하지만 이내 내용이 너무 명확해서 쉽게 질리거나 단순한 시각적 효과에 의해 감동을 주는 작품-구상적이든 추상적이든-에 흥미를 잃었고, 고정 관념에 반하는 내용이 담긴 작품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프랑스 출신 개념미술가 프랑수아 모렐리와 스위스 출신 미니멀리즘 작가 닐 토로니를 만나면서 그들의 컬렉션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두 작가를 비롯해 그들이 소개한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1970년대 후반, 그들은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아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작가의 아이디어에 공감을 하든, 그들의 생각에 거스르는 작품이든, 작품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컬렉션이 이러한 방향으로 집중될 무렵, 부부가 첫 번째로 구입한 작품이 도널드 저드의 작품이었다. 구상적인 작품 컬렉션에 익숙한 부부에게 당시만 해도 너무 실험적인 저드의 작품은 사실 도전이었다. 당시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아트 전문가 지슬랭 몰레-비에빌과 미술사가인 세르주 르무안의 조언이 한몫했다. 이후에도 부부는 딜러, 이론가, 작가들과의 대화를 무척이나 즐겼는데, 이는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작품은 작품을 보고 단숨에 작가의 의도나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대화는 부부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 르 실로 외부에 설치된 프랑수아즈 모렐리의 ‘Pi Rococo Red No. 11-1=30°(14 Decimal)’, 1998. 로렌스 웨이너의 ‘Two Stones Tossed into the Wind(Causing Sparks)’ 2 르 실로를 위한 커미션 워크로, 전시장 1층에 영구 설치된 펠리스 바리니의 ‘Three Square Hollow’, 2011, Image Courtesy of Billarant Collection 3 빌라랑 부부를 묘사한 스탠리 브라운의 조각 ‘Portrait Double’, 2001, Image Courtesy of Billarant Collection

빌라랑 부부는 본격적으로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아트를 컬렉션하기 위해, 그 계열의 작품을 꾸준히 공부하며 안목을 키웠다. 그들은 스위스, 독일, 미국에 있는 세계적인 미술관과 아트센터를 방문해 흥미를 끄는 작가를 찾아다녔고, 새롭게 알게 된 작가를 깊이 있게 연구했다. 특히 새로운 작가를 대할 때는 ‘이 작가가 현대미술계에, 나아가 현대미술사에 새롭고 특별한 무언가를 가져다줄 수 있는 작가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작가의 작품 세계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할애했다. 작가들의 작품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과정이 긴 만큼, 컬렉션 작품 선정에도 신중을 기했다. 어떤 작가를 그들의 컬렉션에 포함시킬지에 대한 조사 기간이 몇 년씩 걸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결정하는 동안 작가의 작품이 다 팔리거나 가격이 크게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1980년대 후반 미술 시장이 붐을 이루면서 당장 작품을 구입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 금세 팔리거나 가격이 너무 올라 구입을 포기해야 할 때도 많았다(얼마 전 그들은 30여 년 전에 놓친 작품을 우연히 다시 만나 바로 구입했다며, 너무 행복해했다). 하나 부부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가들이나 오랫동안 알아온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는 데는 단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컬렉션에 소장된 작품의 수는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우리 역시 지금 소장한 작품의 수를 세본 적이 없다. 그 대신 소장 작가의 작품을 깊이 있게 지속적으로 컬렉션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컬렉션에 포함된 작가들의 작품 수만 세어보는데, 한 작가당 적게는 10점부터 많게는 30점까지 구입했다.” 빌라랑 컬렉션이 여느 컬렉션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은 무엇보다 이 점이 아닐까 싶다. 커미션 워크(Commission Works: 주문 제작 작품). 그들은 작가들에게 자신들의 공간만을 위한 커미션 워크를 많이 의뢰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들의 공간 특성에 맞게 만들어진 특정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는 일차적인 이유와 작가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신선한 아이디어를 들었을 때 그 아이디어를 실현해봤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무엇보다 빌라랑 부부에게는 작가들과의 교류가 컬렉션을 지속하는 이유였기에 커미션 워크만큼 작가들과 친밀하게 교류할 수 있는 훌륭한 장치는 없었다. 그 과정과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에 약간의 위험 부담이 있지만, 작품의 구상부터 제작 과정까지 모두 컬렉션에 포함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더욱 매력적이라고 그들은 덧붙인다. 그들은 전시장뿐 아니라 거주 공간에도 많은 커미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심지어 동시대 작곡가에게 음악 커미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는 음악계에서는 드문 일이고, 그 결과물은 미술 작품에 비해 더욱 예측할 수 없지만 이런 낯설고 예측 불허의 경험이 그들에겐 흥분되는 일이었다고. 부부는 그간의 커미션 작업 중 가장 흥미로운 작품으로 개념미술가 스탠리 브라운이 자신들을 묘사한 작품을 꼽았다. 작가는 두 컬렉터의 신장을 측정하여, 각각의 신장과 같은 길이의 자를 만들어 선반 위에 놓아두고 빌라랑 부부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명명했다. 부부는 이 작품이 그들의 존재를 가장 최소한으로 표현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고백한다.

4 크리진 코닝의 설치(왼쪽 뒤), 건터 움버그의 색면 페인팅(가운데 벽), 프레드 샌드백의 설치(오른쪽 벽), 칼 안드레의 144개의 블록 설치 작품 ‘Silence’, 2005(앞쪽), Image Courtesy of Billarant Collection 5 르 실로 입구에 들어서면 마주하는 작품들. 베로니크 주마드의 조명 설치(앞쪽), 리처드 세라의 설치(오른쪽), 프랑수아즈 모렐리의 네온 설치 작품(뒤쪽), Image Courtesy of Billarant Collection

6 펠리스 바리니의 벽화 작품 ‘The Pentagon in a pentagon in a Pentagon’, 2013, Image Courtesy of Billarant Collection 7 르 실로 맨 위층엔 마련된 스튜디오형 침실. 다니엘 뷔랑의 ‘Half Volume Four Walls’에 둘러싸여 잠들 수 있다. Image Courtesy of Billarant Collection

8 커미션 워크로 전시장 2층에 영구 설치된 닐 토로니의 벽화와 앞쪽에 설치된 칼 안드레의 작품, Image Courtesy of Billarant Collection 9 필립 데크로자의 ‘Untitled’, 2012(페인팅); ‘A Square’, 2006(조각), ‘Process’, 2005(벽화), Image Courtesy of Billarant Collection 10 르 실로를 위한 커미션 워크로, 전시장 2층과 3층을 연결하는 계단 쪽에 영구 설치된 로버트 베리의 ‘Silver Words for the SILO’, 2011, Image Courtesy of Billarant Collection 11 르 실로의 2층에 전시된 세실 바트의 설치 작품, Image Courtesy of Billarant Collection

이렇듯 흥미로운 빌라랑 컬렉션을 보기 위해선 파리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발두아즈 지역, 그중에서도 중심부인 마리네 마을로 가야 한다. 그들의 컬렉션을 오롯이 모은 ‘르 실로(Le Silo)’. 르 실로는 불어로 ‘창고’라는 뜻으로 1962년에 지어진 이 건물이 본래 곡물 보관 창고로 쓰였던 점에 착안하여 지은 이름이다. 부부는 절대주의 구조의 건축적 조각과도 같은 건물 스타일이 그들의 컬렉션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2007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건물의 레노베이션은 프랑스 낭트의 아플릭스 공장을 디자인한 세계적인 디자이너 도미니크 페로의 추천으로, 당시 37세였던 젊은 건축가 자비에 프레딘-허그가 맡았다. 자비에는 기존의 구조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작품을 효과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건축적 예술성과 아름다움은 배제했다. 그리고 마침내 1년간의 레노베이션과 160만 유로의 비용을 들여 2011년 르 실로를 공식 오픈했다. 르 실로의 외관은 농업, 산업 구조물의 흔적이 남아 있고 미술관이라는 표지조차 없지만, 전통적인 교회나 신전 같은 느낌의 차분함과 엄숙함이 느껴지는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건물의 맨 위층에는 빌라랑 부부나 작가들이 이곳을 방문할 때 머물 수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침실이 하나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다니엘 뷔랑의 ‘Half Volume Four Walls’라는 빨간색 줄무늬의 벽화 작품이 방 전체를 채우고 있다. 이 작품은 부부가 오래전에 구입한 뷔랑의 초기 작품으로, 뷔랑 역시 자신의 작품으로 재현된 이 방을 보고 매우 감탄했다고. 이 외에도 르 실로는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설치 작품 8개가 전시되어 있고, 건축과 조화를 이루며 설치된 모든 작품은 개념미술과 미니멀 아트의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컬렉션은 2년에 한 번 작품을 교체하고 한 번에 약 100점에서 13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는데, 작품 선정과 설치를 위한 계획은 항상 부부가 함께 진행한다. 그들은 작품 설치를 할 때 전시장과 설치될 작품의 모형을 만들어 수차례의 시뮬레이션까지 거친다니 전시장 곳곳에서 그들의 오랜 고민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들과의 만남을 유독 좋아했던 빌라랑 부부. 어쩌면 그들의 컬렉션은 소장된 작가들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우정이며, 그들을 지원한 수년간의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부부가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모험할 수 있다는 점은 큰 기쁨이고 행운이었다는 빌라랑 부부. 그들은 컬렉션을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언 역시 잊지 않았다. “작품을 볼 때 첫인상을 따르지 말 것, 작품에 대해 최대한 많이 질문할 것, 스스로 결정할 것, 스스로 노력하여 작가에 대해 공부하고, 이러한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컬렉팅에 진지한지 늘 자문할 것.”

* 글을 쓴 채민진은 Perspectrum Art Advisory의 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