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집은 단순한 생활공간이 아니라 육신과 영혼을 기르는 장소다. 예술과 삶의 궤적이 일치하는 예술가, “예술은 삶의 흔적”이라고 말한 작가 윤형근에게 서울 서교동 집은 그의 작품 속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었다.
2026.08.28
1 1층 작업실 내부. 바닥에 물감 흔적이 가득하다. 2 현관에 걸린 ‘종로화랑’ 문패.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인근의 번화가. 음식점과 상점이 즐비한 골목에서 보기 드문 주택이 닫았던 문을 열었다. 故 윤형근 화백이 20여 년간 가족과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했던 자택, ‘윤형근의 집’이다. 이 건물은 본래 윤형근의 아내인 김영숙의 아버지, 즉 장인인 수화 김환기 화백이 1963년 분양받은 국민주택으로, 1967년부터 윤형근·김영숙 부부가 거주했다. 이후 1983년 파리에서 돌아와 기존 주택을 허물고 새롭게 개축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화백의 동생인 윤도근 건축가가 설계를 맡았는데, 벽돌 색깔부터 공간 구조까지 화백의 의견을 반영했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한국 양옥집과 구별되는 독특한 요소가 돋보인다. 간결한 직사각형 구조와 기다랗게 낸 2층 베란다, 1층 작업실의 노출 천장에서 서구적 미감이, 2층 주거 공간의 나무 천장과 문창살에서 한국 전통 감성이 드러난다.
개관을 위한 복원 작업은 김세진 건축가의 지요건축사사무소가 맡았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기존 집을 그대로 되살릴 것.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고 보수에만 집중해 화백이 거주했던 당시의 모습을 보존했다. 가구와 물건 역시 최대한 과거에 놓여 있던 대로 배치함으로써 부부의 취향과 생활양식을 고스란히 담았다.

정원의 석제 장식물 역시 윤형근 부부가 모은 것이다.
이제 내부를 살펴보자. 먼저 현관에 들어서면 왼쪽 벽에는 현판이 걸렸고 오른쪽에는 목제 신발장이 서 있다. 현판은 김환기가 잠시 운영했다고 알려진 ‘종로화랑’의 문패다. 입구에 걸어두기 다소 엉뚱한 물건이지만, 부부에게는 각별했으리라. 문패 옆 분전함에는 1990년대 스티커가 남아 있어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는 사진과 서신, 전시 팸플릿 등을 전시한 자료실이, 왼쪽에는 응접실과 영상실, 작업실이 펼쳐진다. 맨 안쪽에 위치한 작업실은 1 층에서 가장 넓은 중심 공간이라 할 만하다. 보통 1층에 생활공간을 두는 것과 달리 아틀리에를 배치한 데서 작업을 향한 열망이 엿보인다. 높은 층고에 응접실과 달리 테라초 바닥을 깔고 마당을 향한 큰 창문을 내어 작업에 용이하게 설계했다. 배관이 드러난 노출 천장은 시대를 앞서간 현대적 요소다.
바닥에 물감 흔적이 가득한 이 작업실은 2018년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 재현된 바 있다. 당시 전시실에서 공간을 슬쩍 엿보았다면 실제 아틀리에를 살필 기회다. 작가가 몸을 움직여 붓질을 한 지점에서 완성 작품을 마주하는 경험이 특별하다.
모서리가 마모된 나무 벤치에서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역시 화백이 직접 디자인한 것. 참고로 책상 옆의 나무 선반은 어린 아들을 위해 그가 직접 만들었다고. 착 달라붙은 스티커 자국이 정겹다.

1 2층 거실 풍경. 각종 골동품과 LP, 책을 확인할 수 있다. 2 자료실 벽에 전시된 윤형근 화백의 사진. 3 작업 도구들. 울트라머린 컬러 물감이 눈에 띈다. 4 화백은 아내의 정물화를 위해 병을 들이곤 했다. 5 안방의 문창살과 고가구가 어우러진다. 6 주방의 식탁과 의자 역시 부부가 사용하던 그대로다. 7 김영숙 선생의 컬렉션을 모아둔 내실.
모던한 전시실 같은 1층과 달리 생활공간인 2층은 한층 아늑하다. 실제 사용한 가구, 그들이 모았던 도자기와 미술 작품, 오디오 시스템, LP, 책 등이 빼곡해 부부의 취향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윤형근에게 각별했던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도널드 저드의 작품이 한편에 걸려 있어 반갑다.
상대적으로 작은 주방은 단출한 모습이다. 세월의 흔적 때문에 유일하게 새로 정비한 것이 화장실과 수전인데, 현대 물건인 줄 알았던 황동 환풍구는 윤형근이 파리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작은 내실에는 김영숙 선생의 수집품이, 안방에는 짜임새가 돋보이는 고가구가 전시되어 있다. 한국적인 문창살이 가구의 직선과 조응한다.
윤형근은 이 집에서 작가였고, 생활인이었고, 배우자이자 아버지였다. 가족에게 쓴 편지, 정다운 가족사진, 손수 부부의 이름을 적어 넣은 현판, 정물화를 그리는 아내를 위해 구한 물병, 아이를 위해 만든 책장, 소중히 간직한 장인의 도자기…. 우리는 이 모든 물건에서 그 사실을 감지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근 스무 해가 되었지만, 삶과 예술의 일관성을 강조한 철학은 여전히 집 곳곳에 깃들어 있다.
info
윤형근의 집
기간 9월 1일~10월 17일 회차 11:00, 13:00, 14:30, 16:00(1일 4회)
정원 8명(도슨트 관람) 예약 NOL 티켓
더네이버, 라이프스타일, 플레이스
EDITOR : 박지형PHOTO : 강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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