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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만화책

‘소리 없이 강한.’ 그 시절, 만화책이란 그런 것이었다. 한 컷으로 시원하게 웃겼다가, 또 한 컷으로 절절하게 마음을 울리는 밀당의 고수. ‘웬 옛날사람!’이냐고 외칠지 모르지만 여전히 만화책의 향기를 추억하고, 삶 속에 만화가 스며든 만화광 4명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2017.04.17

함성호는 시인이자 건축가, 건축 비평가다. 남다른 만화 사랑으로 만화 비평서 <만화당 인생>과 카툰 에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을 펴내기도 했다. 언어 이전에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시를 쓸 때도 이미지를 어떻게 글로 표현할지 고민한다. 


‘똑똑똑.’ 까만 밤, 어린 시절 함성호는 불 꺼진 만화당(만화대본소)의 문을 자주 두드렸다. 만화광이었던 아버지는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막내아들인 함성호에게 만화 빌려오라는 심부름을 종종 시켰다. 칼싸움 만화를 좋아하는 아버지, 스포츠 장르를 좋아하는 형들,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누나들의 주문을 받은 그는 만화당을 향해 어둑어둑한 길을 홀로 걸었다. 1시간은 족히 책을 고르다 돌아오면 식구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고, 그는 빌려온 만화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누렸다. 그때 스쳐간 고독과 고요의 시간은 그가 나중에 시를 쓰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당시는 지적 수준이 높은 화가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만화를 그리던 시절이었기에 만화 속에서 또래보다 수준 높은 어휘를 익혔다. 그의 건축 역시 만화와 동떨어져 있지 않은데, 특히 판타지 만화에 등장하는 기괴한 계단에서 영감을 받아 현재 살고 있는 집이자 사무실인 ‘소소재’에 적용했다. 

 

내 마음속의 만화 3  
허영만 <고독한 기타맨> 최고의 뮤지션을 꿈꾸는 주인공의 음악 인생을 다룬 만화다. 생애 첫 시적 경험을 선물해준 만화라 더 인상적이다. 
김민 <불나비> 송나라 시대, 한 장수가 최고의 무사가 되기 위해 당시대 최고의 검객을 찾아가면서 펼쳐지는 얘기다. 최고라는 것, 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녹아 있다. 
김은성 <내 어머니 이야기> 함경북도 사람인 어머니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다. 특히 판화로 찍은 듯한 독특한 그림체가 특징이다. 나의 어머니 또한 함경북도 사람이기에 공감 가는 내용이 많았다.

 

 

이주현은 사랑스럽고 소녀다운 패션 브랜드 ‘마가린 핑거스’의 대표다. 걸리시 룩의 대명사로 불리는 마가린 핑거스에는 옷뿐만 아니라 휴대폰 케이스, 배지, 스티커 등 아기자기한 소품이 가득하다. 

외동딸이었던 이주현에게 만화는 가장 좋은 친구였다. 혼자 놀아야 하는 시간이 많았던 그는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했고, 그렇게 만화책도 사랑하게 됐다. 생애 첫 만화책이었던 천계영의 <언플러그드 보이>를 본 이후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만화책 보는 일은 그가 가장 순수하게 즐기는 놀이이자 취미다.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거나 술을 마시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다. “만화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몰두해서 보고 나면 일에 집중이 잘돼요. 어린 시절, 마실 복장으로 만화방에 가서 보고 싶은 만화를 잔뜩 빌려오는 날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죠.” 만화에서 직접 디자인에 영향을 받는 일은 드물다고 말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로 천계영을 꼽는 이주현이 디자인하는 옷들이 어쩐지 순정만화와 닮은 건 단순한 우연일까? 그는 언젠가 어린 시절 편하게 드나들었던 만화방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다.

 

내 마음속의 만화 3  
천계영 <언플러그드 보이> 천계영 작가의 시리즈는 전부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명작은 <언플러그드 보이>가 아닐까. 순정만화의 새 장을 열었다고 해도 무방할 듯.  
천계영 <오디션> 천재 뮤지션 4명이 오디션을 준비 하면서 겪는 이야기. 제각기 다른 캐릭터의 천재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라사와 나오키 <20세기 소년> 세계를 장악해가는 ‘친구’의 등장으로 시작된 지구 종말의 이야기. 탄탄한 전개와 스토리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최현정은 카피라이터이자 <빨강머리N>의 저자다. 사회를 향해 지르고 싶은 ‘악’ 소리를 어린 시절 본 만화 속 ‘빨강머리 앤’의 캐릭터를 빌려 토로한다. 누군가가 지질하다고, 못났다고 욕할까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그녀는 겁 없이 던진다. 인스타그램에 @redhair_enne이란 계정으로 비정기적으로 한 컷 만화를 업로드한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피아노를 억지로 배워야 했던 시절, 최현정은 피아노 학원에서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다. 월간 만화 잡지 <보물섬>. “시간을 때우려고 <보물섬>을 펼쳤는데 어린 제게는 엄청난 컬처 쇼크였어요. 세상에, 엄마는 이렇게 재밌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니!” 어린 시절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화가예요”라고 대답했던 그가 ‘만화가’라고 바꿔 말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학창 시절 자신이 키우던 강아지를 소재로 그린 한 컷 만화로 학교에서 강아지를 일명 ‘유명견’으로 만들었고, 만화 관련 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다 결국 평범한 회사원이 된 그는 최근 <빨강머리N>이라는 한 컷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돌연 스타 만화가가 됐다. 먼 길을 돌아 결국 만화를 다시 손에 잡은 그에게 만화는 보는 것 이상의 즐거움이다. 동시에 여전히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카피를 쓸 때도 매력적인 대사와 스토리의 흐름, 컷 구성으로 긴장감을 주는 만화의 매력을 교훈 삼는다.

 

내 마음속의 만화 3  
우스타 교스케 <멋지다 마사루> 충격적으로 어이없고, 이상하게 실소가 빵빵 터지는 개그 만화. 내가 접한 최초의 ‘병맛’ 만화다. 순정만화를 주로 보던 내가 개그 만화로 눈을 돌리게 된 터닝 포인트.   
하마오카 켄지 <괴짜가족> 온갖 엽기적인 일로 가득한 한 가족의 이야기. 우울할 때 보면 기분이 단번에 ‘업’된다. 스토리는 ‘병맛’이지만, 그림 디테일의 완성도로 놓고 보자면 최고 수준이다. 
아오노 주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무직의 40대 남자가 만화가를 꿈꾸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이야기. 나도 모르게 “맞아 맞아!” 하며 ‘지질한’ 내 안의 나를 소환한다. 

 

 

박기숙은 사진가이자 박수동 화백의 딸이다. <고인돌> 시리즈, <번데기 야구단>, <꼬마 홍길동과 헤딩박> 등 많은 히트작을 그린 박수동 화백의 아들, 딸은 나란히 사진가로 성장했다. 일상이 곧 만화인 때문인지 모든 순간에 말풍선이 붙는 부작용(?)이 있다. 

만화가의 딸로 성장한 박기숙에게 만화는 일탈이 아닌 삶 자체였다.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집에서 작업을 하던 아버지의 만화 그리는 풍경은 늘 그의 시야에 담겼다. 방향을 바꾸거나 수정해야 하는 내용이 있을 때면 그에게 원고와 지우개가 던져졌다. 아버지가 옆에서 만화를 그리면 아들과 딸은 잘못된 원고를 쓱쓱 지웠다. 이를테면 가내수공업이었다. 잡지사로부터 마감 독촉 전화를 받는 일도, 갓 완성된 원고를 잡지사로 배달하는 일도(퀵 서비스가 없던 시대다) 그의 몫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만화의 면모는 권위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만화는 누구에게나 쉽고 편하게 말을 건다. 그래서 ‘명랑만화’를 특히 좋아한다. 정지된 컷(Cut)에서 매력을 느끼는 그가 카메라를 잡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 자신의 사진이 인상적인 만화의 한 컷처럼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지평을 넓히길 원한다. 그가 셔터를 누르는 한 컷 한 컷에 공을 들이는 이유다.  

 

내 마음속의 만화 3  
박수동 <꼬마 홍길동과 헤딩박> 내 마음속에 새겨진 어린이 마음의 결정판.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만화다. 
아즈마 히데오 <실종일기> 한때 잘나가던 만화가가 어느 날 사라진다. 그가 일상을 놓아버리고 노숙자가 된 뒤의 삶을 그려낸 자전적 에세이다. 세상살이의 리얼한 괴로움을 한 개인의 모험담으로 느끼게 해준다.
다니구치 지로 <에도 산책> 에도(도쿄)를 측량하는 주인공이 도시 곳곳을 산책하면서 일어난 소소한 일상을 
그린 만화다. 아름다운 경치와 그 안에 피어나는 작가의 따뜻한 감성을 좋아해 쉼이 필요할 때 한 편씩 아껴가며 본다. 

 

더네이버, 만화책, 이주현, 함성호, 최현정, 박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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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만화,함성호,만화책,이주현,최현정,박기숙

CREDIT Editor 전희란 Photo 박기숙 출처 THE NEIGHB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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