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ashion

  • 기사
  • 이미지

Oh, EUREKA!

중요한 것은 ‘What’이 아닌 ‘How’라는 것! 지난 10여 년에 걸쳐 가방 쇼핑에 꽤 많은 돈을 투자한 뒤 깨달은 값비싼 교훈이다.

2017.03.28

나의 ‘가방 역사’는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이모가 선물한 루이 비통의 모노그램 네버풀이 첫 주자였다. 두꺼운 전공 책이 너끈히 들어가는 크기의 네버풀 백은 (무모하게도) 장학금을 노린 내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동반자였다. 그 당시 유행한 리바이스의 엔진 스커트나 밑단이 넓게 퍼지는 캘빈 클라인의 벨보텀 팬츠를 입는 날에는 아빠가 대학 입학 기념으로 선물한 프라다의 미니 토트백을 들었다. 지갑과 립글로스, 펜 한 자루 그리고 모토로라의 레이저폰만 넣고도 지퍼가 간신히 닫히는 가방을 겨드랑이에 밀착해 메면 진짜 ‘여자 어른’이 된 듯한 우쭐함에 사로잡히곤 했다. 내 입맛에 맞춰 산 첫 가방은 마이클 코어스의 에스토 라지 사첼백. 2000년 초반, 각종 매체에서는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스타일을 다루는 기사를 우후죽순 쏟아냈는데, 케이트 보스워스의 파파라치 사진에는 늘 이 가방이 등장했다. 잦은 사용으로 각이 무너지고, 진하게 태닝된 가방을 보는 순간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고, 통장 잔고를 탈탈 털어 구입했다. 그 이후로 에스토 사첼백은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까지 나와 가장 많은 추억을 쌓은 가방이 되었다. 물론 중간중간에도 나는 가방을 많이 구입했다. 코치가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상륙했을 때는 백화점으로 달려가 ‘C’ 로고로 뒤덮인 숄더백(등교용)과 같은 패턴의 빨간색 미니 백(데이트용)을 구입했고, 나중에 딸에게 물려주겠다며 엄마를 졸라 버버리 체크 백을 사기도 했다. 그 당시 센세이션에 가까운 열풍을 몰고 온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의 스탐백, 길을 걷다 보면 3초마다 한 번씩 볼 수 있어 ‘지영이백’으로 불리기도 했던 루이 비통 스피디백까지. 남들이 갖는 건 다 가져야만 하고, 또래 친구보다 많은 가방을 가지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었다.
대학 졸업 후, 패션 에디터가 되었고 본격적인 가방 수집이 시작되었다. ‘너 가방 장수 할래?’라는 엄마의 핀잔은 내 타오르는 욕망과 욕구를 잠재울 수 없었다. 매달 촬영장에서 운명처럼 만나는 ‘잇 백’의 유혹을 이겨낼 재간(혹은 의지)이 내게는 없었으니까. ‘잇 백’을 소유하지 않으면 트렌드에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이는 패션 에디터로서 자격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샤넬의 점보 사이즈 클래식 백을 시작으로 멀버리의 베이스워터백(홍콩 여행 중 구입. 합리적인 가격대, 넉넉한 수납공간이 장점), 발렌시아가의 모터백(그 어떤 스타일과도 잘 어울림), 구찌의 재키백(클래식은 영원하다. 영원히 들 수 있는 가방), 생로랑의 뮤즈백(이 가방을 들면 나도 케이트 모스나 린지 로한처럼 보일 줄 알았으니까), 디올의 레이디 디올(소개팅을 위한 가방. 미래를 위한 투자인 셈) 등 시즌마다 ‘잇 백’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는 가방 대부분을 구입했다. 월급은 거의 다 가방 쇼핑에 쓰였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고 보니 가방을 제외한 아이템의 퀄리티가 점점 하향 평준화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여기서 쇼핑을 멈춰야 했다. 

 

하지만 2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가방 쇼핑은 새 국면을 맞았다. ‘잇 백’이라는 용어는 지나치게 촌스럽게 느껴졌다.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 진짜인지 가짜인지조차 구분되지 않는 가방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사들인 가방 중 몇 개만 결혼식이나 가족 행사 등을 위한 용도로 쓰였다. 내 관심사는 새로운 브랜드로 옮겨 갔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의 가방을 누구보다 빨리 손에 넣어야 한다는 새로운 미션이 주어졌다. 피에르 아르디, 제롬 드레이퓌스, 알렉산더 왕, 겐조, 아크네 등 컨템퍼러리 브랜드가 국내에 정식으로 론칭하기 전에는 해외 직구에 열을 올렸다. 기존 명품 가방의 엔트리 가격은 200만원대였지만, 컨템퍼러리 브랜드 가방의 가격은 80만~90만원대부터 시작했다. 합리적인 가격대, 트렌드를 앞서나간다는 만족감 등은 기존에 느낄 수 없던 새로운 희열을 선사했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 나는 가방을 거의 사지 않는다. 드물게 무언가 산다면 수십 년간 약간의 디테일과 소재만 변형된 상태로 꾸준히 출시하며 브랜드 전통을 담은 브랜드의 시그너처 백 정도. 더는 트렌드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한 시즌만 지나면 트렌드 후방으로 밀려나는 데에 대한 배신감이다. ‘잇 백’을 갖지 못하면 트렌드에 뒤처지는 것처럼 느끼지만, 1년만 지나면 그 가방을 드는 게 촌스럽게 느껴진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에 지친 것. 수백만원을 지불하고도,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야 구입할 수 있는 아이템치고는 수명이 지나치게 짧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에게 물려주겠다는 자기 합리화 끝에 구매하지만, 정작 1, 2년만 지나면 나부터 관심이 시들해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을’ 드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드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몇 시즌 전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놈코어’ 스타일은 이 깨달음에 일조했다. 지극히 평범한 소품이나 옷을 이용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패션 시류를 겪고 나자 쇼핑의 중심에는 ‘트렌드’가 아닌 ‘나’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절절히 와닿았다. 지금도 여전히 내 위시 리스트에는 가방이 많이 자리한다. 특히 이달부터 국내 매장에서 만날 수 있는 가브리엘 백과 2년 전부터 꾸준히 사랑받은 아제딘 알라이아의 레이저 커팅 토트백, 만수르 가브리엘의 버킷백과 플랩을 길게 늘어뜨린 프라다의 미니백은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모하게 6개월 카드 할부를 감행한다든가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오매불망 기다리지는 않는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갖고 있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마치 새 가방처럼 새로운 무드를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행은 반복되기 마련이니 몇 년 뒤, ‘잇 백’이라는 이름이 슬그머니 부활할지도 모른다. 그사이 나는 앞서 말한 ‘어떻게’를 더욱 심도 있게 고민할 테고, 정답에 점점 가까워지지 않을까? 그레이스 켈리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켈리백’처럼 나만의 시그너처 백을 찾고 싶은 마음은 지나친 욕심일까? 그것이 욕심이든 아니든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로 관심사가 이동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수입차 한 대는 너끈히 살 법한 비용을 들이고서야 얻은 깨달음이라는 점이 조금 속은 쓰리지만 말이다.  

 

유레카, 잇백, 가방

 

What do you think?
좋아요

TAGS 가방,백,잇 백

CREDIT Editor 신경미 Photo PR 출처 THE NEIGHBOR

Film

film 더보기
SUBSCRIBE
  • 메인페이지
  • PlayBoy Korea
  • MOTOR TREND
  • neighbor
  • 東方流行 China

RSS KAYA SCHOOL OF MAGAZINE

Copyright Kayamedia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