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징후
각 자동차 메이커들이 배터리를 직접 생산하거나 배터리 생산업체를 인수하고 있다. 테슬라는 이미 미국 네바다 주에 배터리 생산 공장 기가팩토리를 만들었다. 현재 완공 상태는 14퍼센트 수준. 테슬라는 기가팩토리 완공을 위해 배터리 생산업체 파나소닉과 손잡고 50억 달러(약 5조80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완공되면 세계 최대 배터리 공장이 된다. 

다임러도 자회사인 배터리 생산업체 ‘도이치 아큐모티브’의 두 번째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5억5000만 달러(약 650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고, 폭스바겐은 100억 유로(약 13조2000억원)를 들여 대규모 배터리 공장 설립을 계획 중이다. 이 외에 포드, BMW, 재규어·랜드로버 3사가 배터리 공장을 공동으로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자동차 메이커들이 배터리 공장을 세우는 이유는 전기차 주도권을 배터리 생산업체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현재 생산되는 전기차 대부분은 AESC, LG화학, 삼성SDI, 파나소닉 등 배터리 전문 기술을 지닌 업체의 것을 사용한다. 판매되는 전기차 원가의 30~40퍼센트가 배터리값임을 감안하면 배터리 업체들의 이익은 엄청날 것이다. 실제로 LG화학은 전기차 사업부문 2015년 매출이 7000억원이었는데, 2016년엔 1조2000억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년 만에 매출이 70퍼센트가량 늘어난 셈이다. 현재 전기차 보급률은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1조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으니, 날이 갈수록 배터리 생산업체들의 수익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자동차 메이커들이 직접 전기차 배터리 생산에 뛰어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는 자기가 만드는데 돈은 저들이 벌어가는 꼴을 어떻게 보겠는가. 배터리를 직접 생산하면 배터리 생산업체들의 배터리 공급가격에 휘둘리지 않고 수익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배터리 업체의 반격
하지만 이미 전기차 시장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배터리 생산업체들이다. 현재 판매되는 절대다수의 전기차 배터리를 이들이 만들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인 셀(Cell)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셀은 배터리 용량과 충전 시간, 크기, 무게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현재 배터리 셀을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이 몇 개 없을 정도로 투자비용과 연구개발 시간이 많이 드는 기술이다. 따라서 자동차 메이커들이 대규모 공장을 짓는다 해도 셀까지 자체 개발하기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때문에 한동안은 배터리 업체에서 셀을 사다가 공장에서 배터리 모듈 팩으로 조립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과 막대한 투자비용을 들여 셀 제조 기술을 갖춘다 해도 이미 대용량으로 셀을 제조하고 있는 배터리 업체와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고 기술 격차에 따른 배터리 품질도 따라잡기 쉽지 않다. 

이미 배터리 생산업체들은 자동차 메이커들의 의지를 꺾고 격차를 더 벌리기 위해 배터리 생산량 늘리기에 들어갔다. LG화학은 폴란드에 전기차용 배터리 공장을 추가 건설하고 있다. 축구장 5개 크기로 연간 전기차 10만대 분량의 배터리를 생산할 것이라 한다. 삼성SDI도 2015년  오스트리아의 배터리팩 생산업체 SDIBS를 인수하고 지난해엔 4000억원을 투자해 헝가리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휴전의 여지
사실 자동차 제조사는 배터리 셀 개발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며 자체 생산하기보다는 우수한 품질의 셀을 낮은 가격에 사다 쓰는 게 이해타산에 맞다. 그럼에도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는 이유는 배터리 업체와의 가격 협상 등에서 어느 정도 교섭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파워게임에서 완벽하게 밀리면 공급가격 협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자동차 제조사가 지은 배터리 공장은 배터리 셀 생산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전기차 생산을 위한 기지인 셈이다. 앞으로 수십만 대, 더 나아가 수백만 대의 전기차를 생산해야 하니 안정적인 배터리 공급을 위해 공장이 필수적이다. 또 셀뿐만 아니라 배터리 모듈 팩까지 배터리 제조사에서 공급받는다면 전기차 시장의 헤게모니를 배터리 업체에 모두 빼앗길 수밖에 없다. 

배터리 생산업체 입장에서도 자동차 제조사의 배터리 공장이 무조건 부담이 될 일은 아니다. 우선은 전기차를 많이 만들어야 배터리 셀을 더 많이 공급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자동차 제조사는 언젠가는 배터리 셀까지 만들게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기술의 격차를 더 벌리고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공장을 더 짓는 것이다. 

 

 

 

거대 용병의 참전
배터리 전쟁은 자동차 제조사와 배터리 업체뿐만 아니라 자동차 부품 회사들도 뛰어들고 있다. 세계 최대 자동차 부품 업체 보쉬는 매년 5300억원 이상 투자하면서 전기차 파워트레인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보쉬는 배터리를 제어하는 수준을 넘어 셀의 에너지 밀도까지 개선할 수 있는 배터리팩과 마찰 손실을 줄여 에너지 활용도를 98퍼센트까지 끌어올린 모터 그리고 전압, 전류, 주파수 등 전기의 특성을 조절하는 파워 매니지먼트 시스템으로 배터리가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보쉬의 발표대로라면 현재 kWh당 5킬로미터 남짓인 전기차 주행거리가 2020년에 8킬로미터까지 늘어난다. 

보쉬의 전기차 파워트레인 기술은 자동차 제조사나 배터리 업체가 무시할 수 없다. 보쉬의 파워트레인은 단순히 배터리 셀의 효율성에만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터리 매니지먼트 시스템, 모터, 인버터 등 전기차에서 가장 중요한 파워트레인 시스템의 최적의 설계와 토털 솔루션을 제공한다. 

자동차 업체 입장에선 보쉬가 완벽한 배터리팩 매니지먼트 시스템뿐만 아니라 파워 일렉트로닉스 시스템까지 제공한다면 그들의 기술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는 마치 내연기관 시대에 대부분의 차가 보쉬의 인젝터를 사용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내연기관 시대에 돈을 가장 많이 번 부품업체는 전기차 시대에서도 가장 훌륭한 무기를 팔아 돈을 벌고자 한다. 

 

 

다시 혼전 속으로 
보쉬의 독주를 저지하기 위한 연합도 있다. 독일 엔지니어링 기업 지멘스와 프랑스의 자동차 부품사 발레오가 전기차 파워트레인 개발을 위해 연합했다. 지멘스의 구동모터 기술과 발레오의 파워트레인 사업 경험을 결합해 파워트레인의 주요 부품을 통합해 제공한다는 것. 배터리, 모터, 인버터 등의 부품을 단품으로 납품하는 게 아니라 전기차 전체 제어시스템을 통합 설계해 공급하는 방식은 보쉬의 사업 방식과 똑같다. 통합형 파워트레인 매니지먼트 시스템 사업에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 다른 전기차 부품에서도 기술 경쟁이 치열하다. 일본의 전자부품 회사 TDK는 자동차용 반도체 생산업체 인피니온과 손잡고 전기차 전용 고효율 인버터를 개발하기로 했다. TDK는 인버터의 크기와 무게를 줄이고 인피니온이 전력 반도체 소자를 개발해 둘을 통합한다는 것. 인버터는 배터리와 모터 사이에서 전압 주파수를 바꿔 모터의 회전속도를 제어하는 중요한 부품이다. 

테슬라의 대항마로 관심을 끄는 전기차 스타트업 기업 패러데이퓨처도 새로운 전기차 인버터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기존 인버터에 사용되는 수많은 트랜지스터 및 전자부품을 최소화해 부피와 무게를 줄였고 전기차에 적합한 전기량을 예측해 기존 인버터 대비 20~30퍼센트 개선된 변환 효율을 달성했다고 한다.
 

 

새로운 역사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의 전쟁 역사는 과학기술 발전을 촉진하는 수많은 갈망 중 하나였다. 내연기관 시대에서 전기차 시대로 변화하는 지금, 자동차 관련 기업은 명운이 걸린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 전쟁의 가장 큰 무기는 기술. 전기차 배터리 기술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할 것이고, 인류는 머지않아 빠르고 조용하면서 집에서 쉽게 충전하고 매연도 배출하지 않는 새로운 이동수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흡입-압축-폭발-배기의 시대가 끝나고 있다. 지구를 굴러다니는 12억대의 자동차는 점차 충전과 방전이라는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전기차의 효율성과 성능을 경험한 인류는 어쩌면 비효율적이면서 환경오염을 가중시킨 내연기관 시대를 비통한 역사로 여길지 모른다. 배터리 전쟁이 이런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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