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의 부야베스

서울에서 보내는 네 번째 겨울이다. 한국의 매서운 겨울이면 더더욱 생각나는 국물 요리, 바로 부야베스다. 프랑스식 해물 스튜인 부야베스.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의 부야베스가 생선을 베이스로 한 걸쭉한 스타일이라면, 파리식 부야베스는 좀 더 깔끔한 편. 생선 뼈, 랍스터, 사프란, 화이트 와인, 토마토, 야채 등을 넣고 끓인 국물은 한국의 해물탕을 떠올리게 한다. 해산물의 시원하고 깔끔한 맛을 기본으로 하되, 보기와 달리 맵지 않아 더욱 좋다. 이제야 말이지만 나는 셰프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더 나은 호텔리어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시절, 요리를 배워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취득했다. 쿠킹 스쿨에서 클래식 프렌치 요리를 배웠는데, 부야베스는 그때 직접 만들어본 요리이기도 하다. 이 겨울처럼 매섭지만 활력 넘치던 그 시절. 부야베스는 그때의 초심을 떠올리게 하는 요리다. 요즘도 가끔 호텔 34층에 위치한 ‘테이블 34’에서 부야베스를 먹곤 한다. 이곳에선 부야베스를 좀 더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해산물 마르미트(Marmite)라는 이름이긴 하지만.

내 영혼의 양파 수프

음식은 장소에 대한 추억이 되고, 젊은 시절의 영상으로 남는다. 나에게 기억되는 국물 요리는 20대 후반 파리 유학생 시절에 한식 국물 대신 아침 나절 내 속을 따뜻하게 데워준 양파 수프(soupe  `a  l’oignon)다. 라면, 월남국수 등도 좋았지만, 집 앞에서 또는 학생 식당에서 오전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양파 수프만큼 고마운 음식이 없었다. 귀국 후 파리에서 먹던 양파 수프의 기억을 되살려준 곳이 바로 토미 리 셰프의 ‘비스트로 드 욘트빌’. 미국에서 수학했지만 그의 음식은 더없이 프랑스적이다. 로마 시대부터 먹기 시작한 양파 수프는 17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방식으로 요리되어 프랑스의 전통 요리로 발전했다. 욘트빌의 양파 수프는 오픈 이래 7년간 한 번도 중단된 적 없는 이곳의 장수 메뉴로, 사골을 오븐에 로스트한 후 여러 야채와 함께 장시간 우려낸 비프스톡(육수)과 하루 종일 천천히 익힌 양파 위로 그뤼에르와 에멘탈 치즈로 그라탱한 방식이다. 맛이 진하고 고소하며, 특히 육수와 양파의 순수한 조합은 결코 질릴 수 없는 맛이다.

정장 신사와 꼬치어묵

2016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 학교 행사가 있었다. 그날따라 갑작스레 날씨가 추워진 것도 모자라, 행사가 열리는 곳이 하필 용인 부아산 정상이었다. 정장에 구두를 신고 산행 아닌 산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춥고, 발은 시리고, 400m 정도 되는 낮은 산이었는데도 마음은 한라산을 등반하는 기분이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마침 꼬치어묵과 따끈한 국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장 입은 신사와 꼬치어묵. 서울 도심이었다면 분명 어색할 조합이겠지만 꽁꽁 언 몸은 자연스레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수백 번은 먹었을, 새로울 것 없는 어묵이었지만, 그 어디에서 먹은 어묵보다 맛있었다. 음식은 몸과 상황을 녹이고,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한 꼬치의 어묵일지라도. 마치 음악처럼 말이다.

속 시끄러운 날의, 연포탕

겨울, 나를 힘나게 하는 국물 요리. 1초도 고민할 것 없이 연포탕이다. 서울에는 수많은 연포탕 집이 있지만 내가 즐겨 찾는 집은 약수역 인근의 ‘녹동뻘낙지’, 그곳의 연포탕이다. 스트레스를 풀어야 할 때 나는 종종 이곳을 찾는다. 이런 겨울날에는 더더욱. 중국산 낙지가 판치는 가운데 이곳은 전남 고흥의 녹동항에서 올라온 낙지만 사용한다. 연포탕은 무엇보다 기본 육수가 중요한데, 이집은 기본 육수에 홍합을 조금 넣어 감칠맛이 진하다. 육수와 홍합의 나무랄 데 없는 밸런스. 거대한 전문점이 아닌 작고 허름한 노포에서 발견한 뜻밖의 맛이라고 할까? 테이블 5~6개의 작고 허름한 가게라 남자끼리, 어릴 때 친구끼리, 함께 가면 참 좋은 곳이다. 술 한잔 곁들이면 더욱 좋고. - 한사코 매체 노출을 꺼리는 주인장 탓에, 그곳의 연포탕을 재연한 것임을 밝힌다.

아버지와 나눈 한 그릇, 도가니수육

나를 힘나게 하는 ‘국물 요리’라는 단어와 함께 나의 추억 속 시계는 흑석동에 멈춰 섰다. 중앙대학교병원 지하상가에서 먹은 도가니수육 국물. 올해로 86세 된 아버지는 생애 처음 이곳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셔야 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아버지를 비롯해 우리 가족은 자연스럽게 병원 생활을 하게 됐다. 다행히 아버지는 건강을 빠르게 되찾았고, 회복 이후 아버지를 모시고 가장 먼저 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따끈한 도가니수육을 맛있게 먹던 그날의 기억. 식사를 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앞으로 더 건강하실 거라는 희망이 느껴졌던, 따뜻한 가족 식사였다. 우리가 그날 먹었던 것은 사골 국물이 아닌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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