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회사는 거꾸로 해도 사회다. 도망갈 틈이 없다. 격무와 공동체 생활에 시달리다 집에 가면 집일이 기다린다. 휴일은 쉬는 날이지만 아빠는 운전사, 여행 가이드, 베이비시터, 짐꾼, 주부, 목수, 슈퍼맨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한다. 예전에 어떤 아빠가 출퇴근하는 1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때만큼은 지하철이든 차든 오롯이 내 시간이고 나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아빠의 심정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만약 일과 가족에게서 해방돼 혼자 즐길 수 있는 단 하루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친구들과 낮술 마시기, 방에 틀어박혀 미드 몰아보기, 스쿠터를 타고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기, 휴대전화 꺼놓고 숙면 취하기, 만화방에서 라면먹으며 드래곤볼 복습하기 등 상상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사실 앞서 나열한 것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해볼 수 있는 평범한 여가 거리다. 뭔가 오래된 남자의 로망을 충족하면서 <한여름 밤의 꿈>처럼 근사한 건 없을까? 문득 9년 전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목격했던 어느 멋진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 제안해본다.

 

 

 

호주 골드코스트 ‘서퍼스 파라다이스’는 이름 그대로 서퍼들의 천국이다. 서핑하기에 적당한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들어온다. 개인적으로 아침 7시가 북적이지 않고 서프 브레이크(서핑을 할 수 있도록 파도가 부서지지 않고 지속되는 상태)가 좋다. 9년 전 서퍼스 파라다이스에서 잠시 살고 있던 나는 아침 운동 삼아 가끔 서핑을 즐겼다. 어느 날 아침 지붕을 연 오래된 BMW 3시리즈 컨버터블(E30)이 길가에 섰다. 뒷자리에는 3미터는 족히 돼 보이는 긴 서프보드가 대각선으로 꽂혀 있었다(실었다기보다 꽂았다가 더 정확하다). 운전석에서 온몸을 구릿빛으로 그을린 일본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내려 보드를 꺼냈다. 그는 차의 지붕을 닫지도 않은 채 보드를 들고 해변으로 향했다. 약간의 스트레칭을 한 뒤 리시코드(보드와 발목을 잇는 끈)를 발목에 묶고 바다로 몸을 던져 패들링을 시작했다. 독특할 것 없는 평범한 서퍼의 모습이었음에도 난 눈을 뗄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두고 간 지붕이 열린 3시리즈 컨버터블에 계속 눈이 갔다. 이른 아침 머리 위로 나부끼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해변에 와 파도와 실컷 뒹굴고, 다시 바닷바람과 엉키며 집으로 가는 기분은 어떨까? 바람과 파도야말로 진정으로 남자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매개체가 아닐까?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소원을 이뤄보기로 했다. 우선 BMW 650i 컨버터블의 지붕을 열고 뒷자리에 2.9미터 길이의 서프보드를 실어 바다로 향했다. 이 차의 색은 찌르면 금방이라도 피가 터져 나올 것같이 새빨개 그 자체만으로 시선을 끌었다. 지붕을 열었을 때는 보트처럼 보이게 디자인돼 뒷자리에 얹은 서프보드와 제법 잘 어울렸다. 컨버터블에 이만한 액세서리도 없겠다 싶은 생각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행색이라 행인들의 눈길은 마치 자석이 달린 듯 이 이상한 모습의 차를 따라 움직였다.이 차는 스포츠카의 껍데기를 썼지만 승차감은 부드럽고 편안하다. 시동을 걸면 기본적으로 컴포트 모드로 세팅이 되고 주행 모드를 컴포트 플러스로 선택할 수 있다. 주행 모드에 따라 다이내믹 댐퍼 컨트롤이 힘을 빼고 더하며 승차감을 조절한다. 컴포트 플러스에서 스포츠모드로 변경하면 갑자기 신발 끈을 꽉 조인 느낌이다. 5미터가 살짝 넘는 길이 탓에 생각만큼 날렵한 코너링은 어렵지만 V8 트윈 터보 엔진이 쏟아내는 449마력의 힘은 차를 부드럽고 가볍게 밀어붙인다. 뒷자리 레그룸은 최대 250밀리미터로 차 덩치에 비해 넓진 않지만 아이나 여성이 앉기에 적당하다. 다만 시트 포지션이 엉덩이 아래쪽으로 쏠려 있으므로 키가 작은 아이가 카시트 없이 앉는다면 몸이 앞으로 접혀 상당히 불편하다.

 

650i 컨버터블은 아빠를 ‘아재’가 아닌 ‘남자’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하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사납게 몰아치는 이중성과 언제든 하늘을 마주하고 머리 위로 바람을 불러올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아이언맨 2>의 토니 스타크처럼 컨버터블의 남은 자리에 길고 커다란 무언가를 실을 수 있는 과감함까지 안겨준다.

 

빠듯한 촬영 스케줄로 아쉽게도 바다에 들어가진 못했다. 서프보드를 컨버터블에 실어 바다에 와 기분을 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9년 전의 소원을 갈빗집의 ‘맛보기 냉면’처럼 간만 보니 오히려 더 현실화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1억원을 호가하는 차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적당한 가격의 로드스터나 컨버터블로도 충분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