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로 가득한 서재에서 포즈를 취한 길버트 & 조지.

지난 50년 동안 한결같이 스리버튼 테일러 메이드 슈트와 화이트 셔츠, 자신들의 캐릭터가 들어간 넥타이 차림이다.

 

1969년 ‘노래하는 조각’이라는 퍼포먼스를 통해 ‘살아 있는 조각’으로서 자신들의 신체를 전시하며 현대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킨 아티스트 듀오 길버트 & 조지. 길버트 프로에시(Gilbert Proesch)와 조지 패스모어(George Passmore)는 1967년 런던 세인트 마틴에서 만나 이듬해 듀오를 결성, 지금까지 함께 작업을 해오고 있다. 당시 젊은 개념미술가 세대에 속했던 이들은 현대미술을 지루하고 난해하다고 비평하며 작업실을 떠나 예술의 주제와 소재를 일상의 사물과 장소에서 찾고, 이를 실험하는 데 몰두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유머와 풍자가 담긴 독보적인 작품을 선보이기에 이른다.

 

 

 

1 18세기 인테리어를 그대로 보존한 2층의 서재. 벽면은 18세기 페인트와 같은 성분으로 제작한 것으로 칠했고, 가구와 카펫은 빅토리아 시대에 제작된 오리지널 디자인이다.

2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쓰인 의자의 벨벳 커버에 그들의 이니셜을 새겼다

3  전성기가 지나 버려진 생활 도자기와 화병을 집중적으로 모은 결과, 길버트 & 조지의 19세기 화병 컬렉션은 박물관을 만들어도 될 정도다. 햇빛에 색이 바래지 않도록 철저히 보관하고 있다.

 

“이 집은 1968년에 구입했어요. 그때만 해도 이곳은 런던 변두리 지역이었던 터라 비교적 싸게 구할 수 있었죠. 우리의 모든 작품은 이곳에서 영감을 얻고 이곳에서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티스트로서뿐만 아니라 삶의 동반자이기도 한 길버트 & 조지 커플은 런던 이스트엔드에 자리한 18세기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한 집에서 50여 년의 세월을 동고동락했다. 길버트와 조지가 집에서 처음으로 안내한 곳은 좁고 긴 터널과 같은 복도를 지나야 나타나는 스튜디오. 검붉은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 안에 자리한 현대적인 스튜디오는 1970년대 조각, 퍼포먼스를 필두로 비디오 아트, 사진, 그리고 지금은 디지털 작업에까지 늘 새로운 아트 신을 개척해온 길버트 & 조지의 진보적인 행보에 꼭 들어맞는 공간이다. 텅 빈 작업실 한쪽에는 그들의 영상 작업을 볼 수 있는 프로젝터가 설치되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거대한 세면대와 드럼 스캐너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쉽게도 이 스캐너와 세면대는 더는 쓰지 않아요. 16년 전부터 모든 작업을 디지털로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들, 참 로맨틱하지 않나요?” 두 아티스트가 이를 한창 사용할 때는 분명 진보적인 장비였지만 지금은 퇴화한 기술일 뿐. 그러나 조지는 오히려 그 안에서 낭만이라는 감성을 끌어낸다.
“디지털 작업을 하면서 육체 노동(?)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누렸죠. 더 이상 화학 약품을 갖고 고전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기도 하고요. 솔직히 예전의 방식으로 되돌아가 작업을 하라면 힘들 거 같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리운 게 있다면 고무장갑의 촉감과 냄새예요.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1 길버트와 조지가 좋아하는 영국의 시인 톰 건의 시집과 19세기 공예운동 시절에 제작된 화병

2 길버트 & 조지는 고서가 놓인 서재에서 독서를 하며 작업의 영감을 얻는다. 벽면의 자카드 패브릭과 초상화는 19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들의 스튜디오는 1980년에 마련한 곳으로, 집 바로 옆에 있던 토지를 구매하면서 확장을 통해 탄생했다. “집을 떠나지 않으면서 작업실을 확장하는 길은 옆에 있는 땅을 구매하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마침 집 옆 대지가 매물로 나와 있었습니다. 게다가 거기에 폐가 같은 집이 하나 있었어요. 땅 값으로 건물까지 얻은 셈이죠.” 조지는 ‘예외적이고 특별한 소득’이라는 말을 연이어 강조했다. “누군가 쓸모없다 버리고, 필요 없다 무시하는 것이 호기심 강한 우리에게는 특별한 소득이 됩니다.” 조지의 이 말은 그들의 집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간이 멈춘 듯 고스란히 보존된 18세기 인테리어와 19세기 가구가 자리한 집. 화병과 그림 등 모든 수집품은 진품이고 바닥 타일과 벽면 페인트 등의 마감재는 집이 지어진 당시 사용한 재료와 시공 방식을 고증해 복원했다. 게다가 가구와 오브제는 어느 하나 그냥 놓인 것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자체로 완벽한 화보 사진이 나올 만큼 우아하게 정돈되어 있다.

 

 

 

1 대리석 상감 상판의 테이블은 나폴레옹에게 가구를 제작해준 조지 불럭(George Bullock)이 만든 것이다.

2 욕실의 바닥 타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구석구석 잘 닦아 복원했고, 한편에 놓인 글라스 쇼케이스에는 유리 화병 오브제를 전시해놓았다.

 

 

 

현재는 사진과 영상 작업을 주로 하는 길버트 & 조지. 고풍스러운 집과는 달리 스튜디오는 모던하고 환한 분위기를 낸다. 캐비닛 안에는 지난 50여 년간 만든 작품 및 자료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이 집을 돈과 명예, 섹스와 인종, 종교와 정치, 희망과 공포 등 사회적 부조리를 자신들의 누드 사진과 과격한 텍스트 등을 활용해 강렬하고 급진적으로 표현하는 길버트 & 조지의 보금자리라고 한다면 그 누가 믿을까? “집을 이렇게 만든 이유는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을 복원하고 존중하는 과정, 정형화된 아름다움의 규칙을 따르는 작업은 정신을 순화하고 가다듬는 기회가 되죠. 무질서하고 과감한 작품을 그리고 그 안에 명확한 메시지를 담기 위해서는 본질을 탐구하는 시공간이 필요합니다.” 길버트와 조지의 집에 대한 굳건한 신념은 매혹적이면서도 기이하다. 원형 그대로 복원한 주방에서는 한 번도 음식을 만들어본 적이 없고, 심지어 달걀 하나 삶아본 적이 없단다. 부엌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물건은 전기 주전자로 인스턴트 커피를 마실 때 물을 끓이는 정도다. “이 집이 세상에서 잊히고 내리막길을 걷는 데 300년이 걸렸어요. 길버트와 나는 이 집을 복원하면서 앞으로 300년을 내다보고 준비했어요. 그러니 지금의 상태를 보존해 오래 남아 있게 하려면 최대한 사용을 자제해야 합니다.”
주방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는 곳은 2층의 도자기 수장고다. 2층에 있는 방 대부분은 길버트와 조지가 애정을 갖고 모은 도자기, 화병이 진열되어 있는데 사용하지 않을 때는 늘 셔터 도어를 내려놓는다. 자연광에 화병과 도자기 색상이 바래지 않게끔 하는 조치다. “도자기뿐만 아니라 벽면 색상도 자연광에 의해 바랠 수 있어요. 지금 이 방에 칠한 페인트는 절대 핥아서는 안 돼요.” 조지의 설명이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집을 위해 특별 제조한 페인트거든요. 오리지낼리티를 살리기 위해 옛날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 납 성분이 많이 들어 있거든요.” 농담 같은 진담 속에 그들의 집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새삼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이 집과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가구는 모두 19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우리가 19세기 가구를 집중적으로 모은 까닭은 일종의 연민이었습니다. 한때 빅토리언 시대 가구라고 하면 ‘쓰레기’처럼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어요. 그런데 그런 처사가 우리처럼 사회로부터 차별당하고 배제되는 것같이 보였어요. 실제 그 가구를 사용해보면 굉장히 합리적인 디자인으로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실용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는데 말이에요.” 조지는 19세기 가구를 보호하는 마음으로, 그 시대에 두드러진 활동을 한 가구 디자이너의 작품을 모으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중 재미 있는 일화는 주방에 놓인 테이블을 구할 때다. “이 테이블은 19세기에 활동한 건축가 겸 디자이너 아우구스투스 푸긴이 만든 것으로, 수도원에서 사용하고 있었죠. 가구 딜러를 통해 이 테이블을 구입할 수 있었는데, 딜러가 하는 말이 수도승이 저희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원하던 테이블을 구할 수 있으리란 기쁨도 잠시, 길버트와 조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단다. 행여 종교관이 다른 자신들이 대화를 나누다 충돌해 테이블을 구할 수 없게 되진 않을까 해서. “가구 딜러가 걱정 말라 하더군요. 수도승은 침묵 수행 중이라 식사만 같이하고 싶어 할 뿐이라고요.” 이러한 열정으로 수집한 가구는 실제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집 안에 정물처럼 놓인 것도 다수다. 서재에 조형 작품처럼 놓인 철제 다리가 돋보이는 책상은 조지 불럭이라는 가구 디자이너가 나폴레옹을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작가가 나폴레옹을 위해 만든 모자 걸이 스탠드 역시 갖고 있습니다.” 19세기 가구 디자이너에 대한 길버트와 조지의 경외심은 집 안 곳곳에서 확인된다. 공예운동가 크리스토퍼 드레서, 건축가 윌리엄 모리스와 함께 ‘더 레드 하우스(The Red House, 영국 남부에 있는 아트&크래프트 사조를 반영해 만든 집으로 19세기 영국 건축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를 만든 필립 웹, 작가 오스카 와일드를 위해 가구를 만든 에드윈 고드윈의 가구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놓여 있다.

 

 

 

 런던 이스트엔드의 터줏대감인 길버트 & 조지의 집과 스튜디오. 수직으로 뻗어 나온 건물은 운 좋게 공짜로 얻은 것으로, 그들의 집과 연결해 작업실로 만들었다.

 

“가구는 작가와 그 의미가 명확한 것으로 수집했다면 책과 동전과 같은 것은 저희가 느끼기에 가치 있는 것으로 수집했죠.” 실제 그들이 모은 동전과 책은 금전적인 가치가 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예술과 삶 속에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존재해요. 버려진 것, 변형된 것, 무시당하는 것들에 대해 특별한 흥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지는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받는 것들에서 늘 영감을 얻는다. “우리 두 사람은 기존 사회와 조직에 대해 늘 저항했어요. 어찌 보면 우리는 아웃사이더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꿈이,  비전이 승리할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집을 가꾸고 예술 활동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길버트와 조지의 집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집이 위치한 런던의 이스트엔드라는 지역이다. 그들은 이스트엔드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우리는 어떤 곳도 여기만큼 우리 시대의 현재를 잘 설명하는 곳은 없다고 생각해요.” 앞서 말했듯 길버트와 조지가 집중하는 주제는 돈, 인종, 섹스, 종교, 희망, 절망으로 압축할 수 있다. “삶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다 여기에 집중되어 있어요. 역사는 현재와 엮일 수밖에 없죠. 저는 이를 두고 시대정신이라 표현해요. 그리고 우리가 사는 장소는 어디든 이 시대정신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길버트는 그런 맥락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이스트엔드가 훌륭한 표본이라 말한다. 한때는 공장과 노동자들이 밀집된 소외 지역이었다가 지금은 아티스트들의 성지로 각광받는 지역이 되는 등, 흥망성쇠를 몸소 겪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길버트와 조지는 요즘은 이 지역에서 수집한 폐기물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곳곳에 붙인 스티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현수막, 종교 선전물, 불법 약물 도구 등이 주된 수집품. “도시라면,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자연스러운 부산물이죠.” 조지는 이러한 소소한 것에서 현실적인 메시지를 찾아내는 작품을 통해 희열을 맛본다. “심지어 이런 것에서도 영감을 얻어요. 오전에 집을 나서기 전, 우연히 집 안에서 성냥개비를 봤는데 길을 걷다가 그 성냥개비와 같은 핏빛의 토사물을 본 거죠.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엔 정말 독특한 경험 아닌가요?” 조지가 이를 보고 떠올린 단상은 이름 하여 ‘위대한 폭발!’이다. 그가 말하는 위대한 폭발에 담긴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작품을 통해 확인할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스튜디오 벽면에는 근래 길버트 & 조지의 작품을 프린트해 붙여놓았다. 신체를 조각으로 간주하는 그들은 모든 작품에 본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며, 디지털 작업을 통해 주제 의식과 색감을 한층 강렬하게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