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인 액세서리 브랜드 안나크루아의 디자이너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방미애. 

 

6월 초부터 7월 말까지 이태원에 위치한 코오롱 플래그십 스토어인 ‘시리즈’에서 디자이너 방미애의 안나크루아 팝업스토어가 열리고 있다. 한류가 세계 곳곳에서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굳이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이태원의 테라스에 앉아 있노라면 러시아, 인도, 미국, 남미, 캐나다, 중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대체로 인도 레스토랑에 가야 인도인을, 미국 스타일의 바에 가야 미국인을, 펍에 가야 영국인을 더 많이 볼 수 있지만 시리즈 매장의 팝업스토어에는 유독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단지 구경만 하러 온 건 아니다. 팝업스토어에서 소개하는 안나크루아 백을 보기 위해서이다. 테라스에는 안나크루아의 쇼핑백을 옆에 두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여럿이고, 자신의 나라에서 숍을 열고 싶다며 미팅을 청하는 외국인도 보인다.

 

“2014년에 팝업스토어를 열었을 때 인지도가 낮아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매출이 좋았지. 그 인연으로 다시 코오롱에서 팝업스토어 제안이 들어와 7월 말까지 진행하게 됐어. 그런데 놀랍게도 지난해 왔던 손님들이 다시 찾아주고, 외국인들도 다시 방문해 재구매를 하더라고. 참 기분 좋은 일인 것 같아.” 실제로 디자이너 인터뷰를 위해 시리즈 매장을 찾았을 때 캐나다에서 온 교포가 이런 디자인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며 클러치와 미니 백을 구입해 갔고, 며칠 뒤 그 교포의 지인이 브랜드 유통에 관심이 있다며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백을 구매한 한 러시아 여행객은 자신의 나라에서 매장을 오픈하고 싶다며 다음 날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고 떠났다.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2013년 가을에 매장을 오픈한 그녀는 어시스턴트 한 사람을 데리고 일한다. 혼자서 디자인하고, 동대문에 소재 구하러 다니고, 인테리어하고, 영업하고, 판매한다. 대기업에서 브랜드를 론칭할 때도 적정 인력과 자본 투자는 필수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서 한다. 수량이 적고 규모가 작아도 출산의 아픔은 꼭 같은 것이기에 개인이 혼자 브랜드를 론칭한다는 것은 정말 큰 부담이었다. 

 

 

1, 2 새로운 디자인 감성의 안나크루아의 주얼리.  3 안나크루아의 시그너처 아이템인 레이싱 백. 싱가포르 여행 중 이 백의 영감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안나크루아를 론칭하게 됐다. 4 카드 지갑과 클러치. 안나크루아의 백과 클러치는 모듈 형태로, 자석이나 단추를 이용해 둘을 결합하면 또 다른 디자인의 가방이 된다. 

 

 

“사실 매장을 내는 일은 처음이라 겁도 났어. 압구정동이나 이태원에서 해도 손님이 올까 말까 한 상황에 주요 상권에서 떨어진 판교에서 오픈한다고 하니까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걱정했지. 그래도 밀고 나갔어. 오히려 두려웠기 때문에 혼돈의 장소가 아닌 제대로 된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 안나크루아에 어울릴 예쁜 공간을 구하자, 그러자니 자연스럽게 서울 시내에서 멀어지더군. 혼자서 일한다는 건 물론 쉽지 않아. 모두 반대해도 과감하게 일을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 일이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밀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어려워.” 그녀는 과감하게 패션 메카를 떠났고, 하늘은 그녀를 도왔다. 마침 코오롱의 플래그십 스토어인 시리즈는 작은 규모로 사업을 하고 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을 까다롭게 심사한 후 단기간 무료로 장소를 제공해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안나크루아야말로 그들이 찾는 일인 기업 디자이너였다. 둘의 파트너십은 성공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참 기막힌 타이밍이었어. 론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막막한 때에 이태원에서 진행한 팝업스토어는 브랜드를 키울 수 있는 동력이 되었으니까. 생각지도 않게 백화점 바이어들까지 만날 수 있었고. 지금은 롯데백화점 멀티숍에까지 입점했어. 팝업이 끝나고도 여기저기서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몇 번이고 그만둘까 생각했어.” 사실 그녀가 혼자서 브랜드를 론칭한다고 했을 때 패션계는 모두 의아해했다. 제일모직 빈폴 레이디스와 액세서리 총괄 상무라는 완벽한 경력이 그녀 이름 석 자 앞에 있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 한국 패션계를 주름잡은 논노 패션을 시작으로 한섬의 타임, SJ, 대하 패션의 ENC, 그리고 빈폴 레이디스와 액세서리까지 그녀가 맡은 브랜드는 하나같이 승승장구했다. 가장 최근에는 랑방 스포츠를 론칭,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런데 굳이 잘나가는 대기업을 마다하고 홀로, 그것도 판교에서 브랜드를 론칭한다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참 많은 것을 경험했지.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치를 보고 체험했을 거야.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했어. 답이 안 나오더라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했지.” 지금이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20년이 넘도록 ‘슈퍼 갑’으로 살아온 그녀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슈퍼 을도 아닌 병, 정의 입장에서 일개미처럼 일하게 된 것이다. 스케치도 하고, 디자인도 하고, 판매도 해야 한다. 가끔 전화를 하면 언제나 동대문 시장이나 성수동을 헤매고 있었다. “시장을 뒤져야 가격대 부담이 없는 재미있고 좋은 소재를 찾을 수 있지. 그런데 막내 디자이너일 때 말고 이렇게 나와보니 별세상이더라. 우리나라 시장 정말 재미있어. 어찌 보면 늦게 고생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처음 일 시작하던 때로 돌아가 긴장감 넘치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아 좋기도 해.” 나이 들어 안정된 직장이 아닌 왜 사서 고생하는지 굉장히 궁금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본 그녀의 모습 중에 가장 생기 넘치는 때가 요즈음이다. 훌륭했다. 남들은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기 두려워하고 있을 때 그녀는 다시 막내 디자이너처럼 샘플 조각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샌드위치를 먹으며 돌아다니고, 책상에서 가죽을 자르고 조각 내어 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세련된 컬러 스펙트럼은 안나크루아의 자랑이다. 

 

방미애는 20년 전에 내가 막내 디자이너로 근무하던 시절의 사수다. 패션 업계에서는 꽤 유명한 스타급 디자이너로 카리스마 넘치는 매서움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그녀가 홀로 서기를 한다고 했을 때 난 은근히 걱정되었다. 장군처럼 기업을 호령하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혼자서 신데렐라같이 일할 수 있을지. 더군다나 승승장구하며 옷으로 성공하던 그녀가 옷이 아닌 가방으로. 솔직히 고백하겠다. 처음에 그녀는 빵을 만들겠다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진로를 고민하다 어느 날 곰보빵을 만들어봤는데 주변 반응이 좋았단다. 꽤 자신감이 생겼는지 어느 날 함께 밥을 먹다 그녀가 진지하게 얘기했다. 지금까지 옷만 만지며 살았으니 이제 음식을 만들어보겠다는. 확실히 트렌드를 빨리 읽기는 한다. 지금이야 TV 틀면 여기저기 셰프와 레시피가 나오는 세상이니 그때 곰보빵을 제대로 굽기 시작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경험과 노하우로 쌓인 그녀의 패션 감각이 곰보빵을 만들기엔 너무 아까워 내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제안했다. “저… 예쁜 백을 만들어 곰보빵을 선물로 넣어주시면 어떨까요?” 그렇게 한마디 던졌을 뿐인데 그녀는 하찮은 쇼핑백에서 영감을 얻어 멋진 백 브랜드를 만들었다.

 

“워낙에 백에 관심도 컸지만 경제 불황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이 큰돈 쓰는 데 부담을 느끼게 됐지. 돈은 쓰고 싶지만 돈 없는 사람들이 가장 현명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는 사치로 백만큼 좋은 아이템이 없다고 생각했어. 그렇다고 사이즈가 여러 개인 신발은 재고 부담도 컸고. 작은 사치를 위해서는 최상의 아이템이지.” 경제 용어에도 ‘작은 사치 Small Luxury’라는 단어가 있다. 더군다나 에르메스나 샤넬 백이 아니어도 자신을 고급스럽게 만들어줄 아름다운 가격의 백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녀는 곧바로 디자인 연구에 들어갔다. 싱가포르를 여행할 때 PS. Cafe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남은 것을 포장해준 쇼핑백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백이 지금의 안나크루아 백이다. 비닐 쇼핑백인데 사이즈와 디자인이 심플하고 세련되어 눈여겨보았다. 어느 날 구깃구깃 구겨진 비닐 쇼핑백을 닮은 종이 가방을 만들더니 다음에는 스테이플러로 엉성하게 고정한 가죽 가방을 만들었다. 그렇게 혼자 집에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보고 꿰매보고 하더니 다음에는 진짜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조금씩 멋진 가방 형태로 변하더니 어느새 세련된 백이 완성됐다.

 

왼쪽 레이싱 백의 영감이 된 싱가포르  PS. Cafe의 쇼핑 백.  오른쪽 이태원 시리즈에서 7월 31일까지 안나크루아의 팝업스토어가 열린다. 

 

싱가포르에서 카페에 데려가준 친구 레이(Rei)의 이름과 싱가포르를 합성한 ‘레이싱’이 이 백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자신에게 영감을 준 사람이나 도시를 넣은 백을 디자인할 예정이다. 자신만의 스토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하면서도 명쾌한 시선, 그리고 오랫동안 쌓인 내공은 새롭게 론칭한 브랜드임에도 견고하고 완성도가 높아 벌써 매각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처음에는 두려웠지. 큰 브랜드에서 일해왔다고 해도 조직 안에 있었으니까. 이렇게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아주 작은 공간이어도 나 혼자서 운영하고 꾸려가야 한다는 건 거의 공포에 가까웠어.(웃음) 모든 비용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도 큰 부담이었고. 그저 하루하루 견디고 조금만 더 버텨보자라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왔어. 생각해보면 기적 같은 일이지. 힘들 때마다 예전에 같이 일한 사람들이 우렁각시처럼 나타나 인테리어나 그래픽 디자인을 도와주었으니 여기까지 왔지.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어. 이젠 공간을 운영하고 브랜드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아. 조금은 자신이 생겼어. 커다란 조직과는 또 다른 형태로.”

 

 

 

 

역시 다른 시각으로 고민하고 끈기 있게 도전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대기업 상무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있을 때도 듣지 못한 말을 뒤늦게 할 수 있게 된 그녀가 참 대단해 보였다. “백은 자신의 일기와도 같은 패션 아이템이야. 아주 사소하고 소중한 것, 그리고 은밀한 것에 이르기까지 내 모든 것을 담아두기 때문이지.” 예전에 일기장을 고를 때 매번 고심해서 골랐다. 남편감을 그렇게 찾았으면 벌써 결혼했을 것이다. 자신의 비밀을 적어두는 일기장처럼 나만의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 바로 핸드백이다. “편리하면서도 똑똑하고 예쁜, 그런 일기장 같은 백을 만들고 싶었어. 스타일은 말이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 제아무리 비싼 명품일지라도 자신만의 안목과 개성 없이 소비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애꿎게 에르메스 백과 샤넬 백이 욕을 먹곤 한다. 디자인이 좋아서도 아니고 자신의 스타일 때문도 아닌, 그저 남들이 들었으니까 혹은 몇 가지 컬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 구매하는 사람이 있어서다. 비싸다고 나쁜 것도 아니고 싸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아름다운 스타일을 제시할 수 있느냐이다. 그런 점에서 디자이너 방미애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았다.

 

구매자 스스로 작은 사치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백 디자인에 DIY 방식을 넣은 것이다. ‘일석이조’. 그녀는 클러치와 메인 백을 각각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자석과 단추를 이용하여 또 다른 디자인으로 변경이 가능한 모듈 형식을 도입했다. 클러치를 몇 개 구입해서 하나의 백으로 즐길 수 있고, 반대로 클러치 하나와 다른 색상의 백을 매치할 수도 있어서 컬렉터까지 생겼을 정도. 참으로 똑똑하고 세련되고 실용적이고 유니크한 디자인이다. 이 디자인 방식으로 그녀는 특허까지 땄고, 지난해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디자인 상인 ‘DFA(Design for Asia Award)’에서 수상했다. 안나크루아의 ‘Anna’는 그녀가 후원하는 아프리카 소녀의 이름이다. 그리고 ‘Croix’는 불어로 십자가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보다는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다 맞아떨어지더라고. 단지 그때까지 어떻게 견뎌낼 것인지가 문제야. 이렇게 혼자 일을 시작하면서 새삼 다시 느끼게 된 것 같아. 이 모든 것은 정말 간절한 마음에서 이루어진 기적이지.” 자신에게 꿈을 이루게 해준 안나의 기도가 펠리칸에게 전달되어 그녀에게 기적을 이루어준 게 아닐까.

 

이 글을 쓴 서은영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서은영의 세상견문록>의 저자이며, 최근 스몰 숍을 소개하고 여행을 이야기하는 www.polascope.com을 론칭했다.

방미애 대표는 혼돈의 장소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자신의 공간을 만들고 싶어 판교에 매장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