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퓨처>, <007>, <트랜스포머>, <이탈리안 잡>, <허비>, <듀크 오브 해저드>, <스타스키와 허치> 같은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자동차가 확실한 역할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곧 이런 차들은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는 특별히 자동차가 생각나는 경우가 없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그 어떤 장면에도 소품이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 길거리에 놓여 있는 돌멩이 하나도 모두 의도한 것이다. 따라서 옷차림이나 소지품은 등장인물의 성격과 처한 상황 등을 설명해주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니까 집 다음으로 큰돈을 들여 선택하는 자동차라면 등장인물에게는 두말할 필요 없이 중요하다. 자동차로 표현되는 것은 단순한 경제력 그 이상이다. 인물의 성격, 삶의 방식뿐 아니라 내용 전개의 복선으로도 쓰일 수 있다. 특정 장면에서 꼭 등장해야 하는 대체 불가의 성격도 지닌다.

이렇게 자동차가 등장인물을 표현해주는 대표적인 영화가 있다. <007> 시리즈다. 007은 그동안 많은 자동차를 다뤄왔다. 초기엔 토요타 2000GT나 로터스 에스프리가 등장했고, 이후 BMW의 적극적인 PPL로 Z3와 Z8도 선보였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차는 뭐니 뭐니 해도 애스턴마틴 DB5다. 애스턴마틴은 영국의 대표 스포츠카로 귀족적이면서도 남성성이 높은 차로 알려져 있다. 항상 단정하게 정장을 입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와 많이 닮았다.

 

 

 

<이탈리안 잡>에서도 자동차가 영화의 스토리텔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니는 하나의 장치를 넘어 캐릭터로 등장했다. 1969년에 개봉한 오리지널 영화에서는 훔친 금괴를 미니로 운반하는 장면이 나온다. 작은 몸집으로 지하도, 인도, 계단, 수로 등을 재빨리 통과하며 도주한 석 대의 미니가 인상적이다. 여기서 미니는 작은 차체와 민첩한 움직임, 그리고 실용성을 강조한 박스형 보디라는 설정을 살려 영화 속에서 성격을 잘 드러냈다. 좁은 골목을 누빌 미니가 없었다면 <이탈리안 잡>이라는 영화는 아예 탄생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2003년 리메이크된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작품 속 자동차는 단순한 도구 이상으로 우리에게 인식됐다. 영화에서 인기를 얻어 특별한 ‘에디션’으로 팔리는 경우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1968년 개봉한 영화 <블리트>에서 주인공인 스티브 매퀸이 탄 포드 머스탱 GT390이 그랬다. 블리트 에디션은 2001년과 2008년 두 세대에 걸쳐 팔렸다. 두 차는 세대가 달랐지만 당시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이랜드 그린이라는 녹색 보디에 영화 속 차를 재현한 장비를 갖췄다. 1960년대부터 2005년까지 나온 디즈니 영화 시리즈 <허비>에서도 1963년형 폭스바겐 비틀이 주인공으로 나오며 특정 자동차의 인기를 더했다. 2012년 폭스바겐이 신형 비틀을 내놓으며 영화 주인공과 같은 데칼을 달아 ‘에디션 53’로 등장시킨 것도 같은 사례다. <트랜스포머> 1편에서 데뷔한 쉐보레 카마로 콘셉트카도 영화와 같은 외장 튜닝 제품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쉐보레 스파크도 같은 마케팅을 했다.

 

 

이렇게 자동차는 특정 작품에서 캐릭터화될 뿐 아니라, 그 작품을 본 사람들의 인식까지 바꿔놓았다. 반면 외국의 성공적인 사례와 달리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자동차가 제대로 활용된 적이 없다. 그나마 스크린에 등장해 가장 화제가 된 차도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부조화를 이뤘다. <베테랑>에 나온 포드 머스탱이 그랬다. 극 중 망나니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는 포르쉐 카이엔을 탄다(차가 여러 번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서울 한복판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은 머스탱이었다. 그래서 ‘재벌 3세가 고작 머스탱을 타겠냐’는 주장이 논쟁으로 번졌다. 하지만 실제로 <베테랑>을 연출한 류승완 감독은 인터뷰에서 머스탱을 선택한 이유가 제작비 때문만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조태오라는 인물을 소개하며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텀블러 모형을 사무실에 전시할 정도로 취향이 분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영화 <블리트>에 등장한 머스탱을 보고 ‘취향이 분명한 사람이 타는 차’라고 해석해 조태오가 머스탱을 선택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해석은 자동차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동의하기 힘들다. 머스탱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포르쉐를 타는 재벌 3세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스포츠카와 머스탱의 이미지가 어딘가 맞지 않다. 이런 사례를 보면 꼭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자동차가 부족한 제작비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자동차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의미다.

PPL로 도배된 한국 드라마는 더 심각한 상황이다. PPL은 한 개의 자동차 회사에서 지원받기 때문에 극 중 인물 모두가 한 브랜드의 차만 이용한다. 그리고 차급을 나이나 재력 순으로 나눠서 탄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경우 천송이(전지현)의 빨간색 메르세데스 벤츠 E 클래스 카브리올레는 캐릭터와 잘 어울렸지만, 도민준(김수현)이 탄 CLA 45 AMG는 어울리지 않았다. 수백 년을 살아온 외계인으로 등장인물을 설정한 탓에 그는 집 안에 수백 년 된 골동품과 고서가 있고, 밥과 차도 전통 있는 노포에서 먹는다. 따라서 그가 선택한 차는 꼭 젊은 이미지의 신차가 아니라도 됐다. 굳이 메르세데스 벤츠였다면 조금 더 클래식한 헤리티지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 등장인물의 분위기에 더 잘 어울렸을 것이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처럼 꼭 자동차로 극 중 인물을 설명하고 캐릭터화할 필요는 없다. 다만 등장인물이 실제로 탈 법한 차를 태우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 이런 비판에서 으레 나올 만한 변명은 제작비 부족이다. 물론 자동차가 고가이고 또 제작비까지 지원하는 차 회사의 PPL을 마다하면서 다른 차를 섭외하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제작비 부족이 아니다. ‘자동차 문화의 빈곤’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극 중 인물이 타는 차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때문에 자동차를 통해 무언가 표현한다는 것이 사치스럽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자동차 문화가 성숙해지면서 관객의 눈도 높아지고 있다. PPL을 목적으로 사용된 차가 눈에 거슬려 보였던 경험은 차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본 일이다. 제작진이 적당한 차를 선택할 역량이 안 되면 전문 컨설턴트라도 섭외해 등장인물에 맞는 자동차를 선택해야 한다.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해 극 중 인물의 패션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작은 변화가 결국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자동차 문화의 빈곤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에디터/김태영

 

* 본 기획의 카톡 대화는 일부 픽션으로 구성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