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이었다. 시트로엥 C4 피카소를 새해 셋째 주에 만났던 건. 불과 이틀 만에 겨울을 보내며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날씨를 견뎠던 것 같다. 기대하지도 않은 대자연의 엄청난 지원이었다. 사실 지원인지 심술인지 아직까지 헛갈리긴 하다.

13일에 충남 태안서 열리는 행사에 다녀와야 했다. 이 정도 거리면 어느 정도 차를 파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자꾸 시승 욕심이 났다. 결국 아침 7시도 안 돼 차를 몰고 나섰다.

시동을 걸었다. 들뜬 기분 탓인지 전에 시승했던 2리터 엔진보다 소리가 경쾌했다. EU6에 대응하는 블루-HDi 1.6리터 디젤 엔진이다. 다만 출발은 소리만큼 경쾌하지 않았다. 묵직했다. 사실 이 1.6리터 블루-HDi 엔진과 6단 EAT6 자동변속기의 조합이 처음은 아니다. 푸조 308 1.6을 통해 가장 먼저 선보였다. 그 후로 이어진 푸조 508 1.6, 푸조 3008 1.6 등에 모두 같은 엔진과 변속기가 들어갔다. 그런데 느낌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가장 좋은 건 단연 푸조 308 1.6이었다. 1.6리터짜리 디젤 모델만 놓고 보면 찰떡같은 궁합을 보여줬다. 그런데 508에서는 조금 점잖아지더니 3008에서는 좀 더 둔한 느낌이 들었다. 즉, 엔진과 변속기의 세팅이 차의 성향에 따라 조정되는 게 아니다. 동일한 구성을 이 차, 저 차에 넣어 각 차의 특징에 따라 다른 성향이 나타나는 것 같단 얘기다. C4 피카소의 묵직한 느낌 역시 그 때문인 듯해 그리 반갑진 않았다.

그래도 속도를 높여가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기어비가 늘어지지 않아 성큼성큼 앞으로 달려나갔다. C4 피카소는 균형이 좋았다. 서둘러 운전대를 돌려도 요동치지 않고 의도에 맞게 잘 따라 들어왔다. 덩치에 비해선 무게중심도 낮게 느껴졌다. 그래선지 코너를 돌아나가는 기분도 좋았다. 기대보다는 속도를 좀 더 높여나갈 수 있었다. 안정적으로 노면을 박차고 달리는 느낌도 평화롭다. 굳이 평화롭다고 한 건 C4 피카소의 광활한 시야 때문이다. 머리 위까지 올라온 앞유리 덕분에 아침의 먹먹한 풍경이 한 아름 시야를 채운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온통 눈밭이었다. 안면도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살짝 불안한 마음으로 운전했다. 차들이 계속 달리는데도 도로에 눈이 쌓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다른 차가 길을 막은 채 서버린 2차선 국도 언덕에서 난 C4 피카소로 그리 어렵지 않게 유턴에 성공했다. 그 후로 조금씩 이 차에 대한 기대가 생기고 쌓였다. 물론 마음이 불안해 계속 수동으로 변속하며 운전하긴 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불안감을 조성하는 사소한 움직임이 거의 없었고 주변의 다른 차들보다 빨리 달리면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단, 겨울용 타이어를 끼우지 않은 상황에서는 인력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꼭 윈터 타이어를 끼울 것을 권한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이처럼 오랜 시간 운전해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안면도에서 1시 반이 채 안 돼 서울로 출발했는데 사무실에는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그동안 난 C4 피카소가 생각보다 바닥에 잘 붙어 다니고, 균형이 잘 잡힌 차란 걸 깨닫게 됐다. 어차피 시승을 위해 탔으니 소득은 있었다고 해야 할까?

하루 종일로 따지면 초고속으로도 달리고 고부랑길도 내질렀으며 꽉 막힌 정체 구간, 지체 구간 등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황과 조건의 도로에서 총 9시간을 달렸다. 그런데 트립컴퓨터상 연비는 리터당 17.3킬로미터나 나왔다. 복합 표시연비가 리터당 15킬로미터인 걸 고려하면 꽤 좋은 수치다. 솔직히 2.0리터보다 1.6리터 엔진이 더 매력적이다. 가격도 내려가고 연비도 좋아졌다. 달리기도 못지않다. 무엇보다 나와 동고동락해줬다. 한동안 이 차를 잊지 못할 것 같다.

SPECIFICATION 기본 가격 3690만원 레이아웃 앞 엔진, FWD, 5인승, 5도어 왜건 엔진 4기통 1.6ℓ DOHC 터보 디젤, 120마력, 30.6kg·m 변속기 6단 자동변속기 공차중량 1560kg 휠베이스 2785mm 길이×너비×높이 4430×1825×1610mm 복합연비 15.0km/ℓ CO₂ 배출량 131g/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