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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건배

술 마시는 일은 앉은 채 불안에서 쉽게 떠날 수 있는 여행 같은 것이었다.

2015.12.17



술에 관한 예찬이라니. 적잖이 곤혹스럽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특별한 사연 없이 술을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내 또래 사람들보다 젊은 친구들과의 만남이 더 잦아졌기 때문이라 여기지만, 20대엔 달랐다. 그땐 할 일 없이 술 마시고 돌아다닌다는 핀잔을 자주 들었지만 이유와 사연이 늘 있었다. 생일을 핑계로, 비가 온다는 이유로, 여자친구와 헤어진 사연을 듣기 위해, 그날 벌어진 시위나 불필요한 논란을 마무리하기 위해, 심지어 ‘그냥 먹자’는 술 내기 등의 온갖 사소한 핑계로 술자리에 앉았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던 때다. 

술 마시는 일은 앉은 채 불안에서 쉽게 떠날 수 있는 여행 같은 것이었다. 담배와 술은 내 젊음의 불안정이 남긴 불편한 흔적이다. 흡연은 그 첫날을 기억할 만큼 명백한 기원을 갖고 있다. 1985년 4월, 봄날의 학교 계단을 기억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흡연은 무리 속에서 조용히 빠져나올 수 있는 손쉬운 명분이다. 담배 한 대 피우겠다는 말은, 이제 좀 내가 이 무리에서 빠져야겠다는 제스처이자 생각 좀 하겠다는 표현이다. 담배는 고독과 지성과 관련 있다. 

술은 좀처럼 기원을 찾기 힘들다. 어릴 때부터 제삿날에 음복으로 한두 잔 받아 마신 것에서 시작해,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중국집이나 바닷가에서 몰래 함께 들이켠 소주처럼 일종의 공동체적 제의처럼 출발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음주에는 적당한 집단의 결사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술은 사람들로 이끈다. 정신, 마음, 기백, 활기, 영혼, 혼령. 술은 모두 ‘sprit’라는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술을 함께 마시는 것은 영혼과 활기를 사람들과 나누는, 서로를 묶는 고귀하고 유일한 수단이다. 일찍이 채플린은 대공황기를 배경으로 만든 <시티라이트>에서 부자와 빈자가 유일하게 평등해지는 순간이 한 잔 술에서나 가능한 일로 보여준 바 있다. 술을 함께 마실 때 가난뱅이 찰리는 부자와 친구가 되지만, 잠에서 깨어난 부자는 지난밤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술 마실 때만이 가능한 인간다움이 있기 마련이다. 취기는 일시적으로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에게 삶의 순수한 쾌락을 포용할 수 있게 한다. 고유의 리듬 덕분이다. 술자리의 쾌락은 즉흥적 재즈 연주자의 리듬에 가깝다. 군대식 술자리란 가장 끔찍한 일이다. 

 


 



담배는 주윤발이 입에 문 성냥개비처럼 영웅적인 제스처를 따라다닌다. <백장미>에서 사형대에 오른 젊은이들이 담배 한 개비를 서로 나누어 피웠던 것처럼. 생애 마지막 담배를 피워 문 사람의 모습은 멋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술을 마신다는 것은 영웅적이지도 지적이지도 않은 모험이다. 30대를 넘기면서 술자리가 시시해졌지만, 특별한 일 없이 술 마시는 일이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기 위해, 격렬한 토론을 위해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위대한 알코올의 작가들 영화처럼 말이다. 당장 떠오르는 존 카사베츠의 모든 작품에서 사람들은 모두 ‘술 아래에 있다(Under the Influence)’. <오프닝 나이트>에서 여배우는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외마디 비명 같은 말을 남기고 소녀가 교통사고로 즉사하자 불안과 광기에 시달려 술에 빠진다.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안심이 안 되는 불안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남편들>이란 작품에서는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에 장례식장에 모인 4명의 중년 남자들이 술을 마시기 시작해 요즘 말로 ‘이게 사는 건가’를 토로하다 술김에 뉴욕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한다. 영화는 불안한 취기에 빠진 이 남자들을 몽롱하게 따라다닌다. 갑자기 이들은 죽음 앞에서 술을 마시고, 그동안 가정에 묶여 한 번도 용기 내지 못한 모험을 벌인다. 그러나 대담한 여행은 우리의 일상이 그러하듯 술에서 깰 때 전보다 더 엄청난 불안을 동반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네 친구는 모두 말은 안 하지만 아내에게 말할 변명을 생각하느라 근심에 빠진다. 모험은 끝났다. 감독이자 주인공을 연기한 존 카사베츠는 집 앞에서 머뭇거리는데, 그때 등교하러 나선 아들이 돌아온 아버지를 향해 던진 말이 걸작이다. “아빠, 이제 엄마한테 죽었다.” 

그루지아 출신의 작가 오타르 이오셀리니아니의 <월요일 아침> 또한 내가 좋아하는 알코올 영화다. 이 영화에서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던 주인공 뱅상은 어느 월요일 아침에 갑자기 공장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나버린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우연히 만난 또래의 노동자와 밤새 술을 마신다. 작가는 사람이란 어쨌든 고독한 것이고, 그나마 고독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다른 이들과 술을 마시는 때라 말한다. 하지만 놀러 온 뱅상과 달리 베네치아의 노동자는 다음 날 일찍 깨어나 출근을 서두른다. 공장 문을 들어서는 친구의 모습을 뒤로하고 뱅상은 서둘러 집으로 되돌아간다. 작은 모험의 끝에 있는 이 예기치 않은 압도적인 멜랑콜리의 감각이야말로 내가 느끼는 최근 술자리의 상황이다. 이는 인간의 삶에 대한, 그리고 영화에 대한 간결한 코멘트이기도 하다.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깨어남이 없는 술자리란 없다. 미안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친구들에게 월요일에 건배를 제안하고 있다. 


about 김성욱은 영화평론가이자 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램 디렉터다. 시네마테크를 통해 인류에게 유의미한 고전과 현대 영화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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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담배,술,월요일,건배,영화평론가,술자리,쾌락,동방유행,東方流行

CREDIT Editor 김성욱 Photo 일러스트 이승범 출처 東方流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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