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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희, 한국 현대사의 아이콘

윤복희는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다

2015.12.10


다이아몬드 이어링과 링은 Gioro, 터틀넥 톱과 페도라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다섯 살 때 데뷔한 천재 소녀 윤복희가 벌써 데뷔 65주년을 맞았다. 칠순의 디바 윤복희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당당한 눈빛을 마주 대하는 일이다. 그 눈빛은 가식 없는 내면의 창이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거침없이 그 창에 투영된다. 그와 함께 그녀에게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인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담담함이 있다.

윤복희의 아버지는 알려진 대로 한국 원맨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전설적인 가수이자 희극인 윤부길 선생이다. 어머니는 무용을 전공한 성경자 선생으로 당대의 무용 최승희의 제자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불세출의 음악적 재능과 함께 가혹한 운명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저는 다섯 살 때부터 무대에 섰어요.”

다섯 살에 시작된 그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기억이 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무대에 있었다. 태어나서 눈 떠보니 무대에 서 있는 격이라고나 할까.

“엄마가 저 일곱 살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병원에 계셨고, 어머니는 생활비와 병원비 때문에 지방 공연 다니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죠. 당시 서른이셨지. 아버지가 병원에서 나오실 때까지 여관에서 일 거들면서 부엌에서 잤는데, 가마솥을 거는 곳이라 따뜻했어요. 거기 부엌칼이 있잖아요. 단순한 어린이 생각에 죽으면 엄마 옆에 간다는 확신이 들더라고. 그랬는데 그 칼이, 따갑고 아프고… 그래서 실패했어요. 교회 지하에 기거하기도 했죠. 방석이 쌓여 있었는데, 그거 두 개만 덮어도 따뜻했어요. 어쨌든 저는 사람들에게 벌써 천재 소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다들 도와주셨어요. 그래서 나는 외롭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윤복희는 밝은 표정으로 외롭지 않았다는 대목을 강조한다. 너무 전면적으로 외로우면, 시시하게 외로울 틈이 없는 것일까. 그렇게 무대에 섰고, 어린 시절에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일이, 어쩌면 보통 사람의 전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 윤복희의 어린 시절에 다 일어났다. 1962년, 루이 암스트롱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윤복희는 게스트로 무대를 함께했다.

“제가 열 살부터 그분 모창을 했거든요. 보통 남자가 하는데, 여자애가 한다는 게 알려져서 한국에 오자마자 저를 찾으신 거예요. 2주 동안 공연하는 데 게스트로 나갔죠.”

1963년 미국행. 1982년에 아주 들어올 때까지, 들고 나기를 반복했지만 20년 가까이 미국 생활을 했다. 혈혈단신 열일곱 소녀가 자신의 예술적 재능 하나로 드넓은 미국의 쇼 무대를 누빈다는 걸 요즘 같은 상황이면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이미 동양인 뮤지션으로는 쇼의 정상에 있었던 김시스터즈 언니들이 도와주었다고 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니까 언니들 이름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거예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잘 알고 지낸 김시스터즈 언니들 안 본 지가 3~4년 됐을 때거든. 그래서 언니 공연하는 데 갔지. 그때 언니들은 톱이었어요. 언니들은 에드 설리번 쇼에 나가고 저는 밥 호프 쇼에 나갔죠. 그건 1년에 한 번 하는 굉장한 쇼였어요. 밥 호프 쇼를 성공적으로 마친 나는 휴가 좀 달라고 해서 1967년도에 한국을 들어왔어요. 잠깐 와서 녹음했는데 그 노래가 ‘웃는 얼굴 다정하게’였고, 그게 빅 히트를 치는 것도 모르고 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지….”

올 때마다 공연을 했고, 이슈가 되었다. 미니스커트를 소개했고 소울 풀한 가스펠풍의 보컬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1976년 2월 27일에 성령을 받았어요. 아침 8시에 차가 뒤집히면서. 전국을 다 돌아다니는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고, 전주에서 마지막 공연장인 대구를 가는데, 아침에 가다가 차가 빗길에 뒤집혔어요. 공중에서 차가 세 바퀴 돌았어요. 그전까지 신앙이 하나도 없고 교회도 가본 적이 없는데. 내가 뭐든지 하면 된다고만 생각했는데, 저한테는 기적이었죠. 물방울 튀는 것까지 다 봤거든요, 공중에서 차가 돌 때.”

 


 


 

재킷과 드레스, 스트랩 샌들은 Jardin de Chouette 제품

 

 

 

한국에 들어와서 뮤지컬에 전념했다. 악극 역시 그녀에겐 아버지 때부터 이어져온 숙명이다.

“내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막달라 마리아 역할을 1981년부터 2006년도까지 했어. 강산에가 그때 유다로 들어왔는데, 연습하자마자 얼마 안 돼서 엄마라고 하더라고. 최민수, 허준호 등 거의 뮤지컬 하는 애들 90%는 엄마라고 많이들 불러. 작업 특성상 강하게 밀어붙여야 하니깐 남자애들은 나한테 많이 맞았지. 여자애들은 아니더라도.(웃음)”

여성으로서 뮤지컬계를 일구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편견투성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불과 1997~98년도 말까지도 여자들한테는 우리나라에서 신용카드를 안 만들어준 거 아세요? 안 나왔어. 남편 데려오라고 했어. 그래서 은행에서 싸우고 그랬어요. 왜 신용카드 만드는 데 결혼을 해야 하냐고. 웃긴 나라였어. 그래도 여자인 건 다행인 것 같아.(웃음)”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윤복희가 ‘여러분’이라는 노래로 대상을 받았을 때, 오빠 윤항기 씨가 지휘를 했다. 두 남매가 부둥켜 안고 우는 모습을 전 국민이 지켜봤다. TV 앞에서 전 국민이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내가 외로울 때는 누가 날 위로해주지? 여러분’ 하고 윤복희가 팔을 뻗었을 때,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그녀의 삶 전부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 노래는 생존의 몸부림이다. 문자 그대로, 윤복희는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다. 윤복희는 헤어짐과 서러움과 외로움을 벗 삼아 살아온 한국 사람들에게 사무치는 무언가를 전해준다. 고난의 운명을 견뎌온 한국 현대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윤복희는 디바이기 이전에 한국 현대사를 뚫고 살아온 한 사람의 여걸이다. 견디기 힘든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였고, 죽음의 능선을 넘어왔다. 폭발적인 뜨거움과 북받침을 선사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겪어온 온갖 고통과 기쁨이 스며 있다.

 

About 인터뷰어 ‘3호선 버터플라이’의 성기완은 시를 쓰고 기타를 연주한다. 누구도 쉽게 아우를 수 없는 당대의 여가수, 윤복희와 김완선, 바다가 그의 날카롭고 온기 있는 시선 안에서 빛나는 드라마가 됐다.



Styling by Cho Yunehee 
Hair Kim Sunhee
Makeup Lee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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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윤복희,인터뷰,서울국제가요제,여러분,뮤지컬,디바,섹시디바,가수,동방유행,東方流行

CREDIT Editor 성기완(Musician, Poet) Photo 신선혜 출처 東方流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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