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피언 트럭 레이싱이 열렸다. 경주에 참가한 트럭들이 성난 물소처럼 트랙 위를 달리고 있다.

 
트레일러를 떼고 머리만 모였다. 묵직한 바리톤의 굉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1 캐스트롤 팀의 요헨 한이 출전을 준비하고 있다. 2 라이너트 팀의 그리드 걸. 이날 FIA의 공식 그리드 걸은 없었다. 3 트럭에도 다운포스를 위해 리어 스포일러를 달기도 한다. 4 해머 내려치기 등 다양한 게임과 이벤트가 곳곳에서 진행됐다. 5 어딜 가든 맥주와 소시지는 빠지지 않았다 6 오프로드 성능을 뽐내는 만 TGS 33480 6X6 7 저녁에는 콘서트가 열렸다

 

18톤 트럭들이 트랙 위를 달렸다. 트레일러를 떼고 머리만 모였다. 묵직한 바리톤의 굉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랩이 추가되고 순위가 바뀔 때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관중석과 잔디밭엔 해병대 전우회가 연상되는 할아버지들, 어린아이와 함께 나온 가족, 이따금 엷은 키스를 나누는 연인 등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맥주와 소시지는 마치 입장권처럼 붙어 다녔다. 관중석 뒤편 광장에는 한껏 드레스업을 한 트럭들이 카리스마 넘치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디선가 라이브 음악과 함께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트럭 레이싱과 함께 축제가 열렸다.
지난 6월 27일과 28일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에서 유러피언 트럭 레이싱이 열렸다. 현지에서는 트럭 그랑프리라고 표현했다. 트럭으로 레이스를 한다니 뭔가 스페셜 이벤트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제자동차연맹(FIA)이 1985년부터 해마다 빼놓지 않고 주관하는 정규 경주다. 올해는 30주년을 기념해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다. 유럽 전역을 돌며 시즌당 9~10개의 트랙에서 레이스를 펼친 후 포인트를 합산해 최종 우승자를 가린다.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경기는 올 시즌의 다섯 번째 경기로 아직 다섯 경기가 더 남았다. 마지막 경기는 10월 프랑스 르망의 부가티 서킷에서 열린다.
결승전이 열린 28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을 찾았다. 경기는 오전 10시에 시작하지만 아침 일찍부터 주차장은 차와 모터사이클로 가득 찼고 입구는 인파로 붐볐다. 빅 이벤트를 예고하는 듯 하늘에선 강한 조명이 트랙 무대 위로 사정없이 내리쬐었다. 관중들은 매서운 햇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그랬다는 듯 여유롭게 경기를 관람했다.
이날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경기는 프로와 아마추어 스테이지로 나뉘었다. 아마추어 경주인 미텔라인 컵엔 총 28대의 트럭들이 나와 레이스를 펼쳤다. 미텔라인이라는 이름은 뉘르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사이에 있는 인근 지명 이름을 딴 것이다. 아마추어 경기라고 해서 무시해선 안 된다. 트럭의 사양과 제원은 프로 레이싱에 나오는 차들과 비슷하고 미캐닉 등 전문 백업 팀도 있다. 이 날 미텔라인 컵에서는 경기가 과열돼 사고가 나기도 했다. 영국에서 온 77번 트럭이 코너에서 다른 차와 부딪치면서 옆으로 전복된 것이다. 다행히 드라이버는 무사했지만 트랙 위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마추어 스테이지는 언제부턴가 ‘영국 챔피언십’이라고 불릴 정도로 반 이상이 영국 참가자들이다. 스테이지가 끝난 뒤 영국에서 온 95번 선수 리처드 컬렉트(54)를 만났다. 얼마 전 XTM <탑기어 코리아>에서 만(MAN) 트럭이 영국에서 비행기를 끄는 촬영을 할 때 그가 현지에서 코디네이터 역할을 했다. 리처드는 노란색 만으로 경기에 참여했다. 중고 트럭을 인수해 경주용으로 개조했는데 자기가 세 번째 주인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트럭 운송 사업을 하는 그는 가족과 함께 페리를 타고 프랑스와 벨기에를 거쳐 이곳까지 왔다. 경주용 트럭 옆엔 더 큰 트럭이 한 대 더 있었다. 컨테이너를 복층으로 개조해 1층은 차고 및 캐리어, 2층은 가족의 숙식 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마치 F1 머신을 25톤 트레일러에 담아 옮기는 것처럼 말이다. 이 트레일러 한 대면 경주용 트럭을 싣고 어디든 여행할 수 있겠다 싶었다. “어느 날 트럭 레이싱을 관람하다 나도 직접 해봐도 되겠다 싶어서 뛰어들었습니다. 어느덧 23년이나 지났네요.” 경주용 트럭을 튜닝하는 데 비용은 얼마나 들었냐는 질문에 “아, 액수 생각하면 슬퍼집니다. 그런 생각 안 하고 열심히 하는 게 좋아요. 그래야 계속 할 수 있어요. 레이스는 열정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옆에서 그를 응원하고 지원하는 가족이 더 대단해 보였다.

 

 

 

지난해 최종 우승자 노베르트 키스. 이날 뉘르부르크링 경주에서도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성숙한 모터스포츠 문화는 그 나라 자동차 산업의 수준을 높인다.

 

 

 

1 서킷에선 트럭들이 달리고 안쪽 광장에선 축제가 열렸다. 2 수상자들이 포디엄에 올라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3 CEPSA 팀의 안토니오가 매섭게 달리고 있다. 이날 안토니오는 종합 5위를 차지했다 4 경주용 트럭을 실은 트럭이 뉘르부르크링 서킷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5 트럭 레이싱을 관람하는 법은 제각각이다 6 단돈 5유로의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오후에 열린 프로 레이서들의 본 게임은 영화<벤허>의 마차 경주를 생각나게 했다. 빠르고 치열하고 거칠었다. 공 없이 하는 럭비 경기였다. 코너에서는 뒤꽁무니가 사정없이 날아가며 트랙 위에 검은색 곡선을 그려댔다. 누군가 그려놓으면 누군가 바로 와서 덧칠을 했다. 연기와 먼지가 섞여 역동적인 효과를 더했다. 레이스가 절정에 다다르자 몸싸움이 더욱 과격해졌다. 문과 문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상위권의 트럭들은 시간이 갈수록 생채기를 입고 앞뒤 범퍼가 너덜너덜해져갔다.
일반적으로 경주용 트럭 한 대가 내뿜는 힘은 1150마력에 토크는 510kg·m를 넘는다. 타이어는 2007년부터 315/70 규격의 R33.5를 사용한다.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캡 안에 있는 커다란 엔진을 뒤쪽으로 이동시켰다. 덕분에 캡 뒤에는 여러 배기 파이프와 매니폴드가 얽힌 멋진 레게 헤어스타일이 완성된다. 속도는 안전상의 이유로 시속 160킬로미터로 제한돼 F1처럼 압도적인 스피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1만2000cc 터보 엔진에서 터져 나오는 육중한 배기음과 헐크 같은 몸놀림은 오직 트럭 레이싱에서만 볼 수 있는 백미다.
이날 우승은 랩타임 24분 54초를 기록한 노베르트 키스가 차지했다. 헝가리의 레이싱 팀 옥소(OXXO) 소속인 그는 지난해 최종 우승자다. 올해도 뉘르부르크링 경기까지 누적 319포인트를 획득하며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2위는 1초 차이로 뒤진 체코 출신 몬 아담 라코가, 3위는 이번 시즌에서 가장 뜨겁게 떠오르고 있는 독일 캐스트롤 레이싱 팀의 요헨 한이 차지했다.
트럭 레이싱과 F1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차다. F1은 레이스에 최적화된 머신을 제작해 극한의 스피드를 겨루는 경기다. 하지만 트럭 레이싱은 기존에 양산된 차와 양산형 부품을 사용한다. 즉 엔진과 내구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손꼽힌다. 경주에 나온 트럭은 프라이트라이너와 스카니아, 이베코, 르노 등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하는 브랜드들이 모였지만 유독 만이 많았다. 만 상용트럭은 잔고장이 없어 유지비용이 적기로 유명하다. 디젤 엔진을 최초로 상용화한 이 회사는 트럭을 만든 지 올해로 100년을 맞았다. 2011년 폭스바겐 그룹으로 소속사를 옮긴 뒤 내실이 더 강해졌다. 1위를 한 노베르트 키스와 3위의 요헨 한도 만을 몰았다. 뉘르부르크링 경기 상위 10위 중 7대가 만이다. 2014년에는 종합 우승 1위부터 3위까지 모두 만이었다. 2010년부터 5년 연속 포디엄 정상에 오른 선수들의 차는 모두 만이었다. 그렇다고 만이 우승자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는 것도 아니다. 시즌 최종 우승자는 오직 포디엄에 올라 국제자동차연맹으로부터 트로피와 함께 상금 2000유로, 팀은 4000유로를 받을 뿐이다. 참가자들은 단지 우승하기 위해 만을 선택한다.
유러피언 트럭 레이싱은 트럭 마니아만의, 트럭 업계 관계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다. 모터스포츠 그 이상이다. 주최 측에 따르면 28일 뉘르부르크링 결승전만 11만4000명이 넘는 관중이 경기를 봤다고 한다. 충남 공주시 인구만큼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모인 것이다. 그야말로 트럭을 테마로 한 ‘모두’를 위한 축제다.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레이싱을 열렬히 응원하며 팬심을 불태우지는 않았다. 1인당 기꺼이 40유로를 내고 들어와 맥주를 마시며 느긋하게 레이싱을 관람했다. 레이싱을 마친 트럭에 경의와 격려의 박수를 건넸다. 게임을 하고 기념품을 받았다. 콘서트를 보며 소리를 지르고 사랑하는 사람을 꼭 안고 불꽃놀이를 봤다.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번쩍번쩍한 트럭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멋진 하루를 즐겼다. 그런 문화를 겪으며 자란 아이들에게 트럭 드라이버는 단순한 운송 노동자가 아니다. 하나의 드라이빙 문화를 창조하며 레이싱도 할 수 있는 ‘트러커’다. 사회 전반에 깔린 성숙한 모터스포츠 문화는 결국 그 나라 자동차 산업의 수준을 높인다. 독일이 자동차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기술이 앞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트럭버스코리아의 막스 버거 사장의 말이다. “독일에는 트럭과 운전자 사이에 특별한 유대관계가 있습니다. 그건 마치 미국의 카우보이 같은 문화죠. 그러한 유대관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트럭 레이싱입니다. 이것은 업계의 행사라기보다 가족을 위한 특별한 문화 이벤트입니다.” 한국도 올해 상반기 가장 많이 팔린 차가 현대 포터다. 일단 1톤 트럭부터 천천히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