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우리는 오래된 차를 통틀어 클래식카로 분류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클래식카는 크게 ‘올드타이머’와 ‘영타이머’로 나뉜다. 올드타이머(Old Timer)란 생산된 지 최소 35년이 지난 자동차다. 이들은 정통 클래식카를 대표하는 본질이자, 찬란한 자동차 역사를 잇는 탄탄한 연결고리다. 최신형 자동차와는 전혀 다른 구조나 목적을 지닌 것이 매력이다.

올드타이머보다 젊은 차 그룹을 영타이머(Young Timer) 혹은 모던 클래식카라고 한다. 생산된 지 25~35년(1981~1995년) 된 모델이 주를 이룬다. 아우디 콰트로, 포르쉐 911 터보(993), BMW M3(E30), 사브 900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자동차에 정밀 전자제어 기술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이전 시대에 태어났다. 아날로그 특유의 기계 중심적인 모습으로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살아있는 유기체 같은 느낌이 담겨 있다. 컴퓨터 제어에 의존하는 최신 자동차 기술로는 흉내 내기 어려운 ‘감성’이다. 영타이머가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랭식 포르쉐와 500대 한정 M3
영타이머 그룹에서 가장 사랑받는 차종은 911 터보(993)와 E30 BMW M3이다. 이들은 21세기에 들어 꾸준히 주목을 받았고, 최근엔 가치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급보다 수요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자동차 수집가들에게 두 차는 버킷리스트 가장 첫 줄에 있다. 이들의 가치는 현란한 자동차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시작된다.

1995년 등장한 911 터보(코드네임 993)는 콤팩트한 보디, 풍부한 감성과 낭만이 녹아 있는 오리지널 911이었다. 시리즈의 마지막 공랭식 엔진, 수제작 모델이란 의미도 특별했다. 기본형 911과 달리 리어 펜더를 키운 차체, 공격적인 프런트 범퍼 디자인, ‘고래 꼬리’ 모양 리어 스포일러 등을 가졌다. 외모부터 묘한 클래식 감성과 고성능 분위기가 감돈다. 물론 겉모습만으로 993 터보를 논할 수 없다. 이 차는 기계적으로도 뛰어난 성능을 발휘한다.

3.6리터 수평대향 엔진은 트윈 터보차저의 도움으로 최대 408마력을 토한다. 포르쉐 기술자들은 전작인 964 터보의 지독한 터보 래그를 줄여 응답성을 끌어올렸다. 출력을 안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네바퀴굴림도 이어받았다. 그 결과 993 터보는 0→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에 4.5초가 걸리고, 시속 290킬로미터까지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데뷔 20년이 지난 지금의 기준으로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성능이다. 동시대의 911 시리즈나 기타 고성능 스포츠카 대비 훌륭한 핸들링과 뛰어난 균형 감각도 자랑이다. 993은 세계 최초로 OBD II(자가진단장치) 단자를 장착한 모델 중 한 대였다. 고도화된 엔진 전자제어 시스템으로 출력을 뽑아내면서도, 당시의 배출가스 기준과 연료 효율성을 만족시켰다. 이 차는 약 6000대가 생산됐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희소성이 대단하다. 컨디션에 문제가 없다면 평균 10만 달러(약 1억1000만원)에 거래되고, 조건에 따라서는 부르는 게 값인 경우도 있다. 지금도 가치와 가격이 계속해서 오르고 있다.

 

 

한편 BMW E30 M3 에보 2도 몸값이 점점 오르고 있다. E30 M3는 전 세계적으로 1만8000여 대가 생산됐다. 그중 에보 2(EVO 2)는 단 500대만 만들어졌다. 에보 2는 탄생 배경부터 흥미롭다. 1980년대 후반 M3는 여러 투어링카 경주에서 메르세데스 190E와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때 더 높은 성능을 갈망한 BMW는 M3 에보 2, M3 스포츠 에볼루션 등 한정판 호몰로게이션을 등장시켰다. 그래서 특별한 구석이 있다. EVO 2는 돌출된 프런트 스포일러를 비롯해 엔진에 BMW M의 상징인 빨강, 파랑, 하늘색의 무늬를 넣었다. 헤드라이트 와이퍼, 독특한 체크무늬 스포츠 시트도 특징이다.

실내에 500대 한정판 로고를 붙였고 차체는 경량화(리어 윈도를 더 얇게 만들고 범퍼 무게를 줄였다)했다. 또 엔진은 고압축비(11:1), 캠 각도 조절(264도), 강화 밸브 스프링 등의 개선을 통해 기본형보다 20마력 오른 220마력을 발휘했다. 경량 플라이휠로 응답성을 높이고, 회전력을 경쾌하게 끌어올린 것도 특징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E30 M3는 미국 중고차 시장에서 1만 달러에 거래됐다. 하지만 현재는 4만 달러(약 4300만원)를 훌쩍 넘는다. M3 에보 2도 현재 9만~10만 달러(약 1억1000만원)에 거래된다. 미국 자동차 웹진 <유로파일>은 에보 2의 가격이 계속 오를 것으로 보고, 향후 15년 안에 40만 달러가 넘는 가격에 거래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다른 영타이머들

1 아우디 콰트로 1980~1991년 생산된 아우디 최초의 상시 네바퀴굴림 모델이다. 마치 종이를 접어 만든 것 같은 각진 디자인이 매력적이다. 유럽에서 1만1452대, 북미에선 1000대가 판매됐고 랠리 호몰로게이션인 스포트 콰트로는 단 224대만 만들어졌다. 스포트 콰트로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비싼 양산차였다. 지금도 일반 콰트로의 몇 배 가격으로 거래된다.

2 사브 900 사브는 한때 많은 마니아층을 확보한 개성 있는 브랜드였다. 특히 사브 900이 사랑받았다. 이 차는 1978~1998년 2세대에 걸쳐 만들어졌다. 그중 1993년까지 생산된 1세대가 영타이머에 속한다. 세단과 쿠페, 해치백과 컨버터블 중 3도어 해치백 터보의 가치가 가장 높다. 각진 해치백 디자인은 호불호가 갈리지만, 이런 개성이 많은 팬을 보유한 비결이다.

3 메르세데스 벤츠 SL(R107) 1971~1989년에 팔린 300 SL과 현대적으로 바뀐 R129 SL 사이를 연결하는 모델이다. R107 SL은 메르세데스 벤츠 호화 로드스터 SL 시리즈의 계보를 잇는 모델. SL로 팔렸지만 보디 형식명인 ‘R107’로 더 많이 기억된다. 배기량에 따라 280 SL부터 560 SL까지 있었다. 우아한 디자인으로 지금까지도 고급 로드스터로 인정받는다.

4 포르쉐 911(964, 993) 1963년 처음 등장한 포르쉐 911은 시리즈 전체가 올드타이머와 영타이머에 분포된다. 그중에서도 1989~1993년에 만들어진 964와 1994~1997년에 만들어진 993이 특히 주목받는다. 포르쉐의 마지막 공랭식 엔진 모델로 지금까지 생산된 차의 3분의 2 이상이 아직도 운행 중이다. 한국에는 컨디션 좋은 차가 드물고, 있어도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다.

 

 

 

 

 

EPILOGUE
영타이머 취재를 위해 포르쉐 993 터보와 BMW M3 에보 2를 한자리에 모았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두 차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번호판을 달고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컨디션을 유지한 차라는 데 의미가 컸다.

이날 등장한 993 터보는 순정 부품으로 차 전반이 복원된 차였다. 외관은 터보 S용 프런트 립 스포일러와 휠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순정 그대로였다. 엔진 및 섀시 전체에 사용된 각종 스티커(경고, 정보)를 새것으로 교체할 정도로 오너가 정성을 쏟아 관리하고 있었다. M3 에보 2도 특별했다. 단 500대 한정 모델 중 204번째 생산된 차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존재하는 유일한 에보 2다(BMW 레지스트리 정보). 그만큼 희귀했다. “날씨가 좋은 날과 비 오는 날 주행 느낌이 완전히 달라요. 빠르게 달리지 않아도 그런 감각을 몸으로 꾸준히 느낄 수 있답니다. 그게 이 차들의 매력이지요.”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지만 오너가 느낀 두 차의 매력은 간결한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두 대의 영타이머를 취재하며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졌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랑이나 흥분과 비슷한 것이었다. 역사 속의 명차가 아직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런 감정을 느낄 이유가 충분했다. 이들은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없는 지나간 과거의 향수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존재를 더 갈구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