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시장 수요보다 한 대라도 적게 차를 생산해야 한다.” 페라리 CEO 세르조 마르키온네는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 회사를 이끄는 비결에 대해 종종 창업주 엔초 페라리의 말을 언급했다. 문제는 페라리가 직면하고 있는 시장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페라리가 250GT나 275GTB, 365 데이토나 같은 고성능 차를 찔끔찔끔 만들던 시절과는 달리 값비싼 페라리를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에 3000만 달러 이상의 현금을 보유한 사람은 19만5000명에 이르며,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사람도 2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2017년 페라리는 약 8400대를 생산하는 기록을 세웠다. 올해도 최소한 9000대 이상을 생산할 계획이다. 하지만 복권에라도 당첨돼 812 슈퍼패스트를 사는 것으로 자축하고 싶어도 2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생산 속도가 판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도 당장 살 수 없다니. 부자들은 대체로 이런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페라리의 수장을 정말로 괴롭히는 문제는 페라리가 제때 차를 공급하지 못하면 결국 다른 차가 그 시장을 가져갈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페라리를 더 생산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 아닌가? 그래서 마르키온네는 2019년까지 생산량을 연간 1만 대까지 늘릴 계획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추세로 보면 판매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금융계와 재무 분석가들은 앞으로 1년 동안 전 세계 백만장자 수가 37퍼센트 이상 늘어날 것으로 확신한다. 이 말은 곧 페라리를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늘어난다는 뜻이다. 동시에 페라리를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의 수 역시 더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엔초 페라리는 헨리 포드나 페르디난트 포르쉐와는 다른 환상 속의 인물이 아닐까? 적어도 이들이 세운 회사는 당장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차를 지금도 고객들에게 제공하고 있으니 말이다.

부자들은 페라리를 원한다. 그런데 꼭 페라리여야 할까? 마르키온네 역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전임자였던 몬테제몰로는 현대적인 판매 기법을 동원해 페라리의 정체성과 전설을 잘 포장했으며, 페라리 로고를 단 4도어 세단이나 SUV가 나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새로운 CEO가 이끄는 페라리에서는 이런 문제를 적극 논의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페라리 세단을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전통적인 4도어 세단 시장은 아무리 페라리라도 어찌해볼 수 없을 만큼 침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SUV가 문제인데, 페라리 SUV는 더 이상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페라리가 포르쉐와 벤틀리, 혹은 람보르기니와 경쟁하는 SUV를 만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페라리 마케팅 책임자 엔리코 갈리에라의 말이다. “SUV도 빨리 달릴 순 있겠지만 스포츠카가 될 순 없습니다. 우리의 전략은 확고합니다. 페라리는 스포츠카를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소식통에 따르면 페라리가 현재 비포장도로도 문제없이 달리는 네바퀴굴림 4도어 왜건 모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GTC4루쏘와 같은 플랫폼을 사용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차를 SUV가 아닌 스포츠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엔초 페라리가 무덤 속에서 놀라 몸을 일으키는 소리 말이다. 하지만 엄청난 수익을 안겨줄 초호화 SUV에 대한 수요가 점점 늘고 있는 지금, 페라리는 새로운 시장에 선보일 차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 차를 SUV라고 부르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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