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집은 헤세가 살았던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사진은 멀리서 바라본 헤세의 정원 모습이다.

사랑하는 작가들의 고향이나 무덤을 찾는 여행을 할 때마다 점점 더 깊이 느껴지는 진실이 있다. 아담한 소도시나 한적한 시골에 살았던 작가의 고향이나 집필 장소가 훨씬 깊고 친밀한 오라를 뿜어낸다는 점이다. 물질적 편의성이나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만족도는 대도시가 더 크지만, 특정 작가가 살았던 장소에 대한 그 고장 사람의 깊은 애정이나 진심 어린 자부심은 작은 도시나 외딴 마을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헤세의 고향 칼프, 브론테 자매의 고향 하워스, 괴테가 오랫동안 살았던 바이마르 등이 그렇다. 작은 도시나 마을이 지닌 힘은 친밀성에 있다. 그 고장 사람은 도시 사람보다 쉽게 낯선 이에게 말을 걸고, 내가 무엇을 찾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매번 물어주고는 했다. 교통이 불편해 찾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다녀오고 나면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가 생기고는 했다.

1 헤세의 집 2층 창문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저 멀리 보덴 호수가 보인다. 헤세 역시 이곳에서 나와 같은 하늘을 보았을 것이다.

2 헤세의 초상.

헤르만 헤세는 이사를 많이 다녔다. 그의 행적을 찾아 독일 남부의 칼프는 물론 스위스의 몬타뇰라까지 고생 끝에 다녀왔지만, 그가 살았던 집 중에 내부까지 완전히 보존된 곳은 독일과 스위스 접경 지대에 위치한 작은 마을 가이엔호펜(Gaienhofen)뿐이다. ‘내 마음의 헤르멘 헤세 루트’의 완성을 꿈꾸는 나에게 이 소식은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칼프의 헤세 생가나 몬타뇰라의 헤세 박물관 모두 훌륭하게 관리되고 있지만 내가 가장 보고 싶은 ‘헤세의 정원’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원을 제대로 유지하려면 매일 수많은 꽃과 나무, 잡초까지 누군가의 애정과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나는 헤세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아가 가꾼 정원을 보고 싶었는데, 가이엔호펜에 그 정원을 보존한 헤세의 집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이엔호펜으로 가는 길은 실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독일과 스위스 접경 지역에 자리한 아름다운 보덴 호수를 둘러싼 라돌프첼 역에 도착했다. 라돌프첼 역에 내리자마자 그림엽서 같은 보덴 호수의 풍경이 펼쳐지는데, 7368번 버스를 타고 가이엔호펜으로 가는 길에도 아름다운 호반의 정경이 커튼 뒤 비밀스러운 침실처럼 아련하게 엿보였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헤세의 집에 도착하니 그 집의 현재 주인인 번트 할아버지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으신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멀리서 왔으니 입장료를 받지 않겠다며 기쁘게 맞이해주셨다.

헤세의 집을 다녀간 사람들의 방명록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헤세의 수많은 수필에서 그려진 아름다운 정원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온갖 꽃이 만개했고, 모든 풀잎과 꽃잎, 나무가 뿜어내는 숲의 향기가 보이지 않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듯했다. 헤세가 거주한 다른 지역의 집은 보수를 거쳐 그 고장에서 운영하는 박물관 형태로 운영되는 반면, 가이엔호펜의 이 집은 ‘헤세가 살았던 시절’의 온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번트 할아버지는 10년 전 파괴될 뻔한 이 집을 구입해 자칫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이 집을 구해내셨다.
헤세는 <데미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나는 <데미안>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헤세를 읽고 또 읽는 것은 ‘내 마음속의 또 다른 나’를 찾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 아닐까. 언제쯤 ‘나 자신에 이르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찾고 있다. 하지만 그 길의 ‘결과’가 아니라 그 길의 울퉁불퉁한 ‘과정’이 진정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눈부신 구도(求道)의 여정임을 이제는 알 것 같다. 헤세는 끊임없이 손짓한다. 자신이 꿈꾸었고, 사랑한 곳, 자신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곳으로. 헤세를 여전히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을 향해 그는 따듯한 구도의 열정을 선물한다.

정원의 뒤편에는 정원에서 멋진 한때를 보내고 있는 헤세의 사진이 걸려있다